제3화
최소아는 하버시아 중앙병원으로 실려 왔다.
눈을 떴을 때, 유리창 너머로 강진혁이 유지아를 안은 채 약을 찾으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강진혁이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그녀는 서로 꼭 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지친 듯 다시 눈을 감고 몸을 눕혔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곁에 누군가 서 있었다.
강진혁이 물컵을 들고 와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왜 유지아 씨랑 안 있어요?”
“네가 다쳤다는 얘기가 퍼졌어. 어쨌든 내 아내니까.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최소아는 피식 웃었다.
“강진혁 씨는 제가 죽었나 보러 온 줄 알았는데요. 아쉽네요. 아주 조금 모자랐대요. 의사 말로는, 그 기둥이 왼쪽으로 1센티만 더 들어갔어도 저는 현장에서 바로 죽었대요.”
강진혁은 창을 등진 채 소파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빛이 역광으로 들어와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무심했다.
“최소아, 너 나 사랑한다며. 근데 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끝까지 못 따라가? 난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여자가 좋다고 했잖아.”
최소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마취가 빠지자 상처는 쑤셨고, 심장은 뼈를 조이는 듯 아파서 무엇이 더 아픈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강진혁 씨, 부모 뜻 거스르면서까지 가난한 남자랑 결혼하는 그런 ‘착한 집 딸’은 세상에 없어요. 저를 집에 들이는 순간부터 아셨어야죠. 제가 유지아 씨랑 풍경이나 즐기고 웃어 넘기는 거 보고 가만히 참고 있을 여자는 아니라는 거요.”
지난 일을 떠올리자 강진혁의 눈동자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네가 강씨 그룹을 위해 해준 건 인정해.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줄게... 내 사랑만 빼고. 그거 말고는 뭐든.”
“그거면 됐어요.”
최소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강진혁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저 아직 젊어요. 강진혁 씨랑 재밌게 놀 시간은 아주 많죠. 걱정 마세요. 저 그렇게 쉽게 못 놓아요.”
강진혁이 매주 유지아를 보러 하버시아와 루넬라를 오간다는 사실을 가장 처음 알았을 때, 최소아는 울고, 소리 지르고, 입에 담기 힘든 저주까지 퍼부었다.
왜 자신은 가장 예쁜 나이, 가장 젊은 시간을 다 바쳐 그의 밑바닥부터 함께 했는데, 그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붙잡으려고 얼굴 두껍게 굴 수 있을까.
죽어버리라고, 내일 당장 길에서 차에 치여 산산조각 나버리라고 악담도 했다.
가장 힘들던 날엔, 가진 걸 전부 돈으로 바꿔 마지막으로 미친 듯 놀다가 그와 함께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왜 자신만 늪에서 허우적대며 모든 걸 내놔야 하는지, 그게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조금 정신이 들자 깨달았다.
공짜로 얻은 여자를 아껴주는 남자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미래까지 걸어서라도 강진혁이 자신과 함께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만들기로 했다.
퇴원 후, 강진혁은 그녀를 하아항으로 데려가 요트를 탔다.
테이블 위에는 어느 하버시아 신문사의 오늘자 신문이 있었고, 심심하던 최소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강진혁, 내연녀 따로 집 마련... 본처와는 하아항에서 염문 행각]
강진혁은 이런 비꼬는 제목을 싫어했지만, 최소아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모님, 강 대표님이 어젯밤 센트럴에서 첫사랑과 밀회했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사실이 맞습니까?”
요트가 부두에 닿자마자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며 비웃듯 질문했다.
“여보, 이건 여보가 잘못한 거죠. 그래도 첫사랑이라면서요? 어떻게 제 뒤에 태우게 해요?”
최소아는 해맑게 웃으며 옆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강진혁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식었다.
그는 기자 가슴팍의 명찰을 훑어보고 짧게 말했다.
“중림일보. 오늘부로 없애.”
그리고 최소아의 손을 끌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총수와 재벌가 부인의 일정은 늘 바빴고, 둘은 다시 옷을 갈아입고 심해포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
아침에 강진혁이 벌인 쇼가 꽤 효과를 봤는지, 둘의 ‘애정 가득한 사진’은 이미 하버시아 전역에 퍼졌고
이혼설은 잠잠해졌으며, 강씨 그룹에 불리하던 악성 루머도 대부분 사라졌다.
덕분에 최소아에게 달라붙던 벌레 같은 사람들도 정리됐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모두가 두 사람에게 건배를 청했다.
강진혁은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 자기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
“이 사람 술 약해요. 이건 제가 마시겠습니다.”
그는 그녀의 잔을 받아 깔끔하게 비웠다.
최소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살짝 몸을 떼었다.
강진혁은 쇼를 할 때는 끝까지 몰입하는 타입이라
가끔은 그런 세세한 손길에 정말로 사랑이 섞여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스무 살 철없는 소녀가 하는 착각이었다. 이제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러워하며 “금실 좋다”, “한눈에도 사랑이 보인다”라며 감탄했지만 최소아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작 그녀만 알고 있었다.
강진혁이 정숙하게 행동했던 이유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는 것을.
술이 몇 바퀴 돌자 그녀도 취기가 올라 강진혁의 어깨에 기댄 채 게으르게, 마치 만족한 고양이처럼 몸을 맡겼다.
연회가 끝난 뒤, 강진혁은 그녀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갔다.
뒷골목은 이 화려한 도시의 겉모습과 달리 더럽고 음침했다.
최소아는 강진혁의 손을 꼭 잡았다.
술 때문인지,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오늘 집까지 데려다주면 안 돼요? 예전처럼요.”
강진혁과 함께 동업하던 그해, 최소아는 늘 술에 취해 그의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항상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났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한 줌의 따뜻함에 중독된 채 놓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던 탓에
약해질 때면 더더욱 누군가의 품을 갈망했다.
최소아가 살짝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아주 가까웠다.
지금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그 순간, 강진혁의 주머니 속에서 그 특별한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진혁 오빠... 집에 정전이야. 무서워...”
“금방 갈게.”
통화를 끊자마자, 강진혁은 망설임도 없이 최소아를 밀어냈다.
“센트럴에 좀 다녀올게. 넌 기사 불러서 들어가.”
최소아는 붙잡지 않았다.
낙서가 잔뜩 그려진 더러운 벽에 기대어 담배를 하나 피우며 그가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 연기가 얼굴을 뒤덮고 흩어졌다.
그러자 문득 떠올랐다.
강진혁이 처음 그녀에게 입맞췄던 순간을.
호텔 뒤편 골목에서, 둘 다 취해 있던 그날.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춰온 순간... 축축한 키스, 사랑이 담겨 있다고 믿고 싶었던 그 눈빛.
최소아는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