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의 깊고 그윽한 눈과 마주친 순간 성유리는 흠칫 놀랐다.
‘박지훈? 이 사람이 왜...’
박지훈은 가늘고 긴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어스름한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박씨 본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성유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여기서 걸어 내려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텐데.”
박지훈이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산 밑까지 걸어갈 셈은 아니지?”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박진우가 쫓아올 리도 없었고 그녀를 데려다줄 리도 더더욱 없었으니까.
“고마워요, 작은아버님.”
차 문을 열고 차에 타자마자 성유리는 다시 현기증이 밀려왔다. 만약 제때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면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방금 뭐라고 불렀어?”
자리에 앉은 후 박지훈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그의 깊은 눈과 마주친 순간 이상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박지훈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스캔들조차 난 적이 없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텐데...’
하지만 그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현기증이 더욱 심해졌고 이젠 몸조차 가눌 수 없었다. 그 순간 몸이 통제력을 잃으면서 저도 모르게 박지훈의 옆으로 쓰러졌다.
박지훈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성유리의 어깨를 감쌌다.
은은한 바이올렛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듯 너무나 익숙한 향기였다.
사실 성유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다.
“유리 씨, 유리 씨...”
박지훈은 품 안의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바람에 양복을 입고 있는데도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늘고 긴 손으로 성유리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꽤 심하게 나고 있었다.
박지훈은 손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내 비서실장 정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를 벨뷰 레지던스로 보내.”
“알겠습니다, 대표님.”
30분 후 벨뷰 레지던스.
정영준은 가정의와 함께 대문을 들어선 후 곧장 2층으로 향했다. 침실 문 앞에 키가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당연히 박지훈이 아픈 줄 알았다가 침실에 웬 여자가 누워있는 걸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박지훈은 결벽증이 있어서 평소 도우미인 김영자에게 청소를 맡기는 것 외에 아무도 침실에 들이지 않았다. 여자가 그의 침실에 들어가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정영준은 옆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대체 누구지?’
약을 먹으니 성유리의 몸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고 깨어났을 땐 이미 30분이나 지난 후였다.
비몽사몽 눈을 떴다가 낯선 방을 본 성유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방 전체가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그레이 톤이었고 햇빛 차단 커튼마저 검은색이었다.
머릿속에 기절하기 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분명 박지훈의 차에 탔었는데... 설마 박지훈의 방에 있는 건 아니겠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선 후에도 몸은 여전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리 씨, 깨어나셨어요?”
문을 열자마자 다정한 눈빛의 누군가와 마주쳤다. 이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인 것 같았다.
김영자는 성유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고는 복도 끝을 가리켰다.
“대표님 찾으시죠? 서재에 계세요...”
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한 사람이 박지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뎌 복도 끝으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박지훈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온 후 성유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는데 뒷모습만 봐도 박지훈을 알아볼 수 있었다.
“대표님, 제가 왜 대표님 집에 있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에 박지훈은 몸을 돌려 성유리의 초췌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표정하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까 내 차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 집이 어딘지 몰라서 일단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어. 아주머니가 이미 약을 먹여줬으니까 열 금방 내릴 거야.”
“감사합니다, 대표님.”
“왜 작은아버님이라 안 불러?”
박지훈은 커다란 책상을 돌아 의자를 빼서 앉았다. 성유리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차 안에서 날 작은아버님이라 불렀잖아. 진우 아내이고 아직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날 작은아버님이라 불러야지.”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가늘고 긴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면서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차 안에서 그를 그렇게 부른 건 당시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성유리가 대답하려던 그때 갑자기 서재 밖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작은할아버지 정말 집에 계세요?”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의 아들 박강훈이었다.
‘강훈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응. 아빠가 아까 물어봤어.”
곧이어 들려온 박진우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등골이 다 오싹했다.
비록 사람들 앞에서 이혼을 꺼내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곳에 있는 걸 들킨다면 변명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소동과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성유리는 일단 몸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상 밑에 숨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대표님, 제가 여기 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성유리는 재빨리 책상을 돌아가 박지훈의 옆으로 다가갔다.
박지훈은 그녀의 시선이 책상 밑에 닿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짐작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박지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의자를 뒤로 밀어 숨을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성유리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허리를 굽혀 밑으로 숨었다.
박지훈이 의자를 끌어당긴 순간 그의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갑자기 가까워진 바람에 화들짝 놀란 성유리는 뒷걸음질 쳤다. 움직임이 너무 컸던 탓인지 뒤로 넘어질 뻔하여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눈앞의 길고 탄탄한 다리를 붙잡았다.
박지훈과 성유리의 시선이 서로 마주했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고 동시에 대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성유리는 재빨리 그의 다리를 놓고 얌전히 쭈그리고 앉았다.
“작은아버지.”
박진우가 박강훈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을 때 실내에는 박지훈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박지훈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왔어?”
성유리는 밑에 숨어서 박진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훈이 상태가 나아져서 원래는 집에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작은아버지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요. 성유리가 그런 자리에서 소란을 피울 줄은 몰랐어요. 작은아버지가 돌아온 걸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가족 모임인데 성유리가 다 망쳐놔서 정말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