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김예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민아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김예은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고 허민아는 그대로 차도로 끌려갔다. 날카로운 급제동 소리를 들으며 허민아는 공포에 질려 고개를 들었다.
통제 불능 상태의 스포츠카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그 순간 끝없이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허민아는 길 건너편에서 전력 질주해 오는 배찬율을 똑똑히 보았다. 그의 동공은 급격히 수축했고 얼굴에는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예은아!”
일촉즉발의 순간, 배찬율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김예은을 안전한 쪽으로 끌어당겼다.
쾅!
그리고 허민아는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끊어진 연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십 미터 밖의 피 웅덩이에 내동댕이쳐졌다.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고 오장육부가 전부 어긋난 듯했다.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고 시야는 점점 흐려졌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찬율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예은을 꼭 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
의식이 어둠에 잠기기 직전, 허민아는 문득 열여덟 살 그해를 떠올렸다. 39도의 고열로 쓰러졌을 때 배찬율도 이렇게 그녀를 안고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곁을 지켜줬었다.
‘어째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때 허민아는 병원에 있었다. 힘겹게 눈을 뜨자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배찬율이 보였다.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그의 꽉 찌푸렸던 미간은 잠시 풀렸지만 곧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예은이를 왜 찾아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난 이미 네가 원한 대로 거리를 두고 있었어. 그런데 왜 굳이 예은이의 삶을 방해해?”
허민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그녀에게 그가 처음으로 던진 말이 걱정이 아닌 추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목이 사포에 걸린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네가 말하는 ‘거리 유지’가 그 여자의 결혼식에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 거야?”
배찬율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나를 조사했어?”
“예은이의 부모님이 예은이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랑 결혼시키려 했어. 난 이미 한 번 예은이를 버린 적이 있어. 그런데 또다시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마지막에는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이런 일까지 따져 묻다니, 넌 정말 공감 능력이라는 게 없어?”
허민아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질문은 치졸한 집착이었고 그녀의 고통은 공감 부족이었다.
“그렇게까지 그 여자가 소중하다면.”
허민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왜 그냥 말하지 않았어...”
그 말은 배찬율이 억눌러 왔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말해서 뭐가 달라져?”
그는 갑자기 몸을 숙여 두 손으로 침대 양옆을 짚고 그녀를 꼼짝 못 하게 가뒀다.
“민아야, 우린 그렇게 오래 함께했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줬고, 난 너한테 단 한 번도 부족하게 한 적 없어.”
그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난 잠깐 길을 잃었을 뿐이야. 조금의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고.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왔어! 그런데 너는? 계속 몰아붙이고 예은이를 놓지 않아. 날 미치게 할 생각이야?”
그 순간 허민아는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묻고 싶었다. 네 살 때 막대사탕을 들고 자기랑 결혼하자고 말했던 게 누군지, 열네 살 때 전교생 앞에서 그녀는 자기 거라며 모든 남학생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게 누군지, 열여덟 살, 불꽃놀이 아래서 좋아한다고 고백한 게 도대체 누군지.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그를 미치게 만든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허민아는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날 때까지 참고 가슴이 요동치는 걸 억누르며 단 한 번의 흐느낌도 새어 나오지 않도록 했다.
그녀의 눈빛에 배찬율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던 분노는 서서히 꺼졌다.
그는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거두고 미간을 누르며 시선을 피한 채 더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네가 불안한 거 알아. 하지만 난 선 지킬 줄 알아. 이미 가정으로 돌아온 이상 앞으로는 예은이를 그냥 평범한 친구로서만 돌볼 거야. 절대 선을 넘는 일은 없어. 그러니까 한 번만 나를 믿어줄 수 없어?”
허민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말투를 쓸 때면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더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상처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는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 피곤하게 눈을 감았다. 병실 안은 서서히 고요해졌고 배찬율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듯 미리 준비해 둔 ‘서프라이즈’를 꺼냈다.
“전에 계속 오로라 보고 싶다고 했잖아. 여행 계획 다 세워놨어.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남극으로 가자. 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말해. 전부 사줄게.”
허민아는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프게 웃었다. 그들의 결혼 자체가 가짜인데 무슨 결혼기념일이란 말인가.
입을 열려던 순간 배찬율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마디만 남긴 채 나가버렸다.
“푹 쉬어. 회사에 잠깐 회의가 있어서 가 봐야겠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바로 올게.”
허민아는 화면에 뜬 김예은의 이름을 흘끗 보며 그가 또다시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며칠만 지나면 그녀는 떠날 테니까. 그 이후로 배찬율이 무엇을 하든, 누구를 사랑하든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