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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산부인과에서 산전 검사를 받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심유나는 자신과 고태준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절대 없다고 확신했었다. 오늘 둘의 결혼기념일에 심유나는 무려 세 시간 동안 레스토랑에서 고태준을 기다렸다. 그 레스토랑은 심유나가 가장 좋아하던 레스토랑으로 3개월 전에 예약해 둔 곳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네덜란드에서 공수해 온, 심유나가 가장 사랑하는 튤립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된 연극 같았으나 정작 남자 주인공이 자리에 없었다. 심유나의 휴대폰 화면은 켜져 있었고 그녀의 친구 강소현이 30분 전 보낸 사진과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유나야, 나 지금 산부인과에 왔는데 네 남편을 본 것 같아...] 사진 속 고태준의 늘씬한 몸매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었다. 고태준은 조심스럽게 여자를 한 명 부축하고서 고개를 숙인 채 뭔가 말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편한 임부복 차림의 여자는 한 손을 배 위에 올려두고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여자는 바로 백하윤이었다. 백하윤은 고태준의 이미 돌아가신 선생님의 딸이자 고태준이 책임감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주고 챙겨줬던 사람이다. 강소현은 그 뒤로도 메시지를 몇 개 더 보냈다. [유나야, 이거... 무슨 상황인 거야? 나 오늘 언니 산전 검사 받는 날이라서 같이 병원에 왔는데 우연히 네 남편이랑 마주쳤어.] [백하윤 얼마 전에 귀국한 거 아니었어? 왜...] [네 남편은...] 심유나는 그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고태준을 처음 만난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심유나는 15년 동안 마치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행성처럼 고집스럽게 고태준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삶 속 유일한 빛이 되고 싶어 했다. 다들 가정부 딸인 심유나가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잘난 고태준과 결혼할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그러나 고태준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작년 결혼기념일 때도 고태준은 심유나를 위해 미쉐린 등급을 받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주었지만 그날이 거의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백하윤이 위 통증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간 탓이었다. 고태준은 초조한 목소리로 심유나에게 말했다. “유나야, 미안해. 하윤이 상태가 많이 심각해서 거기 가봐야 해.” 심유나는 고태준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날 심유나는 홀로 비싼 음식들을 먹었다. 그리고 두 달 전, 고태준은 심유나의 생일날에 그녀와 함께 오로라를 보러 가겠다고 약속하고 항공권과 숙박까지 예약해 두었었다. 그러나 출발하기 하루 전, 백하윤이 해외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강도를 만나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고태준은 그때 또 한 번 심유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백하윤을 만나러 갔다. 백하윤의 아버지는 고태준을 구하려다가 죽었기에 고태준은 그에게 큰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불쌍한 백하윤을 돌보는 것에 있어 고태준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있었고 심유나 또한 그 점을 이해했다. 그래서 심유나는 그동안 고태준을 내조하기 위해 사려 깊고 마음이 넓은 아내를 연기하며 백하윤의 건강에 많이 신경을 썼다. 심유나는 고태준이 자신의 헌신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임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 본 사진은 심유나의 착각을 완전히 깨부쉈다. ‘산부인과라니.’ 그것은 단순히 책임감이라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심유나는 오랫동안 고태준에게 구애를 했고 또 오랫동안 그를 사랑했다. 너무 오래돼서 심유나는 자신이 평생 고태준에게 질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동안 켜켜이 쌓인 실망감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마모되어 버렸다. 심유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수백억짜리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직원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 목걸이는 대신 돌려주실래요?”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건 고 대표님께서 아침 일찍 사람을 시켜 보내온 목걸이인걸요. 고 대표님께서 꼭 사모님을 놀라게 해드려야 한다고 저희에게 거듭 당부하셨어요.” “저 대신 고태준 씨에게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심유나는 겉옷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보다 다른 사람이 고태준 씨가 준 선물을 더 필요로 할 거라고요.” 그곳을 떠나던 심유나는 쓰레기통 앞을 지나칠 때 약지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쓰레기통 안에 버렸다. 결국 그곳에는 향긋한 내음과 눈부신 목걸이,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직원만 남겨졌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심유나는 울지 않았다. 심지어 눈시울 한 번 붉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지난 3년 간의 결혼 생활이 모노드라마처럼 느껴졌다. 고태준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고태준이 심유나를 매우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고태준은 그들의 모든 기념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기념일마다 늘 비싼 선물을 준비했으며, 그녀가 그의 아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리게 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태준은 백하윤의 전화 한 통에 심유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백하윤을 만나러 가는 남자였다. 백하윤은 부부 사이에 똬리를 튼 유령 같았다. 심유나는 더 이상 고태준이 대체 언제까지 책임을 다할지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심유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차를 타고 24시간 영업 중인 프린트샵으로 향했다. “출력 좀 부탁할게요.” 프린트샵 직원은 이혼과 관련된 문서인 걸 확인하고는 옆에 서 있는 연예인 뺨치는 외모의 심유나를 바라보았다. 심유나 같은 엄청난 미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30분 뒤 심유나는 레민 타운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고태준과 심유나의 신혼집이었다. 거실 안 커다란 벽에는 심유나의 사진이 가득 걸려 있었는데 모두 고태준이 직접 찍은 것이었다. 사진 속에는 심유나의 화려하게 아름다운 모습,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조용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심유나는 언제나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유나는 다가가서 그 사진들을 하나하나 조용히 살펴봤다. 그러다가 아직 온기가 남겨져 있는 A4용지를 테이블 위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놓았다. 그것은 이혼합의서였다. 그리고 재산분할 내용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심유나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도, 죄책감도, 보상도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모든 걸 마친 후 심유나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서랍을 열자 안에 빨간 줄 2개가 뜬 임신 테스트기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오늘 고태준에게 그 소식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태준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큰 아이는 불행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 쪽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태준이 돌아온 것이다. 늘씬한 그가 조명 아래 서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고태준은 넥타이를 풀어 헤친 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고, 소파 위에 눈을 뜨고 누워있는 심유나를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 왜 그래?” 고태준은 마치 심유나가 무슨 억지라도 부린 것처럼 말했다. 심유나는 시선을 들며 조용히 고태준을 바라봤다. 심유나가 15년 동안 사랑한 고태준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그에게 완전히 실망한 지금은 그 얼굴이 마냥 낯설게만 느껴졌다. 심유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이혼합의서를 고태준의 앞에 내밀었다. “사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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