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7화 바늘 끝을 맞댄 듯 첨예한 대립

황후의 얼굴 근육이 몇 차례 경련하듯 떨렸다. 눈빛은 불길이 이는 듯 이글거려 감히 누구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의를 가리키며 목이 터지라 외쳤다. “무슨 수를 쓰든 상관없다! 반드시 덕양왕을 살려내라!” “예, 황후마마!” 어의는 겁에 질려 허둥지둥 몸을 돌리며 사람을 시켜 다시 어의원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잠시 후 궁의 어의들이 모조리 불려 왔고 마침내 어의원 원판 대감까지 황급히 들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후는 병풍을 등지고 앉았으나 평소의 위엄은 아들의 죽음을 앞둔 두려움 앞에서 이미 산산이 무너져 있었다. 손때 묻은 염주를 굴리며 입술 사이로는 주문이 흘러나왔으나 마음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눈길은 자꾸만 침상에 누운 덕양 왕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한편, 태자는 침상 곁을 지키고 있었으나 태연한 기색이었다. 방 안을 짓누르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느긋함을 넘어선 한가로움마저 어려 있었다. 마치 침상에 누워 생사가 오가는 덕양왕이 자기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닌 듯 태연하기만 했다. 원판 대감은 침통한 얼굴로 덕양왕의 상태를 살폈다. 탕약을 입에 부어 넣으려 했으나 덕양왕은 목이 막힌 듯 연거푸 기침하다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원판 대감도 더는 약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숨길을 트지 못한다면 곧 위태로움이 닥쳐올 터였다. 이럴 때 가장 빠른 방편은 침술이었다. 경혈을 뚫어 기맥을 열면 반드시 살린다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호흡을 고르게 하여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지금은 탕약조차 삼키지 못하는 형편이라 남은 길은 오직 침술뿐이었다. 하지만 어의원 가운데 침술에 능한 자는 드물었다. 그나마 수십 년간 침법을 연구해 온 이는 원판 한 사람뿐이라 덕양왕의 생사와 관련한 최종 결단은 그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원판은 옆에서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읊조리던 황후를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황후마마, 지금 이 시각 덕양왕 마마를 구할 방도는 오직 침을 놓는 것뿐이옵니다.” “침을 놓는다고 하였소?” 황후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더니 문득 하지연이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염주를 내려놓고 원판 대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원판, 정말로 침을 놓아 덕양왕 마마를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오?” 원판 대감은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확신이라 하기에는 부족하오나,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사옵니다.” 황후의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 “전에는 침술은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소? 바늘이 털끝만치 어긋나도 곧 목숨이 끊어질 만큼 위험천만하다 하지 않았소!” 원판 대감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침술에는 분명 위험이 따르옵니다. 그러나 솜씨 있는 자가 침을 놓는다면 저하의 숨길은 풀릴 터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서 그날 신첩에게 물으셨을 적에 부정적인 답을 드린 것은 소신이 그간 침술에 능통한 의원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옵니다. 다만 혈을 찔러 독기를 풀어낸다는 이론 자체는 허망하다 하기 어렵사옵니다. 문제는 그 술법을 행할 만한 명의가 세상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황후를 향해 물었다. “황후마마, 혈을 찔러 독기를 풀어낸다는 이론을 처음 말한 자가 누구이옵니까? 설사 침술을 직접 행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혹 그 배후에 기이한 의술을 아는 고인을 알고 있을는지 알 수 없사옵니다.” 황후의 뇌리에 곧 하지연의 모습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마음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도 안 된다. 그 계집은 규방에 갇혀 살아온 정승 댁 여식일 뿐. 명의를 만날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하 정승이 어찌 여식을 밖으로 내보내 학문을 접하게 두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 계집은 허투루 꾸민 기색이 없었단 말인가?’ 한 어의가 원판 대감의 말을 듣고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황후마마, 정승 댁 여식이 어찌 의술을 알겠사옵니까. 규방에 갇혀 글과 바느질이나 익힌 규수가 어찌 침술의 이치를 논한단 말씀이옵니까. 고작해야 민간에 떠도는 잡설이나 삼류 의원의 졸본에서 주워들은 것일 터이옵니다. 세상 제일가는 의원들이 모두 어의원에 있사온데, 어찌 양반가 규수의 허언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옵니까.” 그 어의의 이름은 유명상이라 하였다. 며칠 전 덕양왕의 병환이 위급해졌을 때 달려와 시료에 임했던 자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어의원 부원판의 지위에까지 오른 유명상은 하지연이 감히 침술을 입에 올리며 의견을 내세운 그날 이후로 줄곧 그녀를 못마땅히 여겨왔다. ‘규방에 갇혀 지낸 규수가 당대 어의들 앞에서 감히 의술을 뽐내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황후는 유명상을 바라보며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막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바로 그때 곁에 있던 태자가 그 말을 듣고 눈빛을 번쩍이며 물었다. “그 말인즉 하 정승댁 여식 하지연이 침으로 혈을 찔러 독을 푼다고 하였다는 것이냐?” 유명상이 곧 대답하였다. “태자 전하, 하 정승댁 규수는 의술을 알지 못하옵니다. 겉으로 들으면 그럴싸하오나, 실상은 시술이 어렵고 자칫 덕양왕 마마의 목숨을 해칠 수도 있사옵니다. 결코 믿어서는 아니 될 망언이옵니다.” 태자는 이번에는 원판 대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 원판은 침술이 유일한 방도라 말하지 않았더냐.” 원판은 사실대로 아뢰었다. “태자 전하, 덕양왕 마마는 기도가 막혀 호흡이 곤란하옵고 약물 또한 들이지 못하옵니다. 지금으로서는 침을 놓는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사옵니다.” 태자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후를 향해 아뢰었다. “어마마마, 이제 형님의 병세는 달리 도리가 없사옵니다. 침을 놓아야만 살릴 수 있사온데... 비록 위험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 형님의 죽음을 지켜볼 수는 없사옵니다. 차라리 하지연을 불러들이는 것이 옳다 사료되옵니다. 그 여식이 의술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도움이 될 터이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입에서 나온 말이 과연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묻는 것만으로도 단서가 될 것이옵니다.” 황후는 뜻밖의 말을 듣고 놀라움에 숨을 고르지 못했다. 그동안 형제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으나, 막상 생사의 기로에 서자 그 속 깊은 정분이 드러나는 듯하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자, 네가 이렇게 말해주니 어미의 마음이 참으로 위로를 받는다. 네 마음속에 형제를 아끼는 정이 살아 있었구나.” 태자는 슬픔 어린 얼굴로 대답하였다. “어마마마, 형님이 불구가 된 것은 모두 소자의 죄과이옵니다. 옛날 소자를 구하시려다 큰 상처를 입으셨고 그리하여 다리를 절게 되신 것이옵니다. 소자는 늘 죄스러운 마음을 품고 살아왔사오나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어 세월이 흐르며 오히려 원망과 앙금만 쌓였사옵니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 또한 불효요 죄이옵니다. 지금 아바마마께서도 침상에 누우시어 생사가 위태로우신데, 소자가 다시금 형님을 외면한다면 이 나라를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겠사옵니까.” 황후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뒤섞여 가슴을 흔들었다. 형제 간의 갈등이 드디어 풀린 듯하여 기쁘면서도 덕양왕이 여전히 생사의 문턱에 누워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황후는 잠시 심사숙고한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거기 누구 없느냐. 섭정왕을 궁으로 모셔 오너라.” 황제는 중병으로 눕게 된 뒤로는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그는 중대한 일은 반드시 섭정왕 독고용재의 결재를 받으라 당부한 바 있었다. 황후는 내심 섭정왕을 마주하기 싫었으나 아들의 목숨이 걸린 중대한 일 앞에서는 달리 길이 없었다. 급히 사람을 보내 섭정왕을 청하게 하자, 원판 대감이 머뭇거리며 나섰다. “황후마마, 덕양왕 마마의 숨이 이미 위태로우시옵니다. 섭정왕 마마를 모셔 오기까지 지체된다면 병세가 더욱 악화할까 두렵사옵니다.” 황후의 눈매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원판, 그대에게 무슨 계책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침술이라면 어의 중 누구도 익히지 못하지 않았소?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터가 아니오!” 이때 유명상이 앞으로 나아와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황후마마, 미천한 신 또한 침술을 조금은 익힌 바 있사옵니다. 비록 능통하다 말하기는 어렵사오나 덕양왕 마마의 호흡을 고르게 하는 데에는 쓸모가 있을 터이옵니다.” 원판 대감은 그 말을 듣자 놀라며 꾸짖었다. “유 어의!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는 덕양왕 마마의 생명이 달린 중대한 일이오. 자네의 침술은 아직 족히 무르익지 않았거늘, 함부로 침을 놓는다면 자칫 덕양왕 마마를 해치고 말 것이오!” 하지만 유명상은 부원판의 자리에 오른 뒤로 줄곧 원판 대감을 밀어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연을 꾸짖은 그날 이후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한 께름칙함이 남아 의서를 다시 펼쳐 살펴본 결과 그녀의 말이 전혀 허황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비록 하지연처럼 혈을 정확하게 찌르는 술법을 감행할 용기는 없었으나 적어도 호흡을 완화시키는 정도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만에 젖어 있었다.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