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영주는 매년 오뉴월이 되면 비가 그칠 줄 몰랐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침상 위에 누운 심화영은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이때 계집종 송로가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부인께서 돌아오셨는데 궁에 있던 어의들이 전부 명양왕부로 가서 지금 당장은 사람을 보내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선 손수건으로 아가씨를 위해 땀을 닦아주는 게...”
“명양왕 전하께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까?”
단향이 고개를 들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전씨 가문의 독자인데 우리 아가씨를 구하려다가 중상을 입으셨으니... 만약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다면 왕부에서 아가씨를 위해 의원을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심씨 가문을 풍비박산 낼지도 모릅니다.”
송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겠지요. 나리께서 명양왕부에 사죄하러 가셨는데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겠습니다... 유씨 부인은 아가씨의 친어머니인데 의원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 연정 아가씨만 신경 쓰고요.”
단향은 그녀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원망했다.
“우리 아가씨도 참 못 말립니다. 명양왕 전하와 혼약이 있는데 왜 삼황자 전하를 연모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께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 명양왕 전하를 연남산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만 얘기하세요.”
송로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대는 여기서 아가씨를 지켜보도록 하세요. 의원을 불러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가보겠습니다.”
송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침상 위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
심화영은 목이 매우 탔다.
힘겹게 눈을 뜬 그녀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걸 발견했다.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그녀와 전강훈은 이미 죽지 않았는가?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에 조금 낡아 보이는, 익숙한 작은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창밖에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와 잠깐 꿈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곧이어 귓가에서 송로의 아직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깨어나셨어요?”
심화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청록색의 치마를 입은 송로는 피부가 희고 얼굴형이 동그라며 눈매는 반달 같았다. 웃을 때면 젖살도 있어서 아주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겨우 13, 14살 정도 돼 보였다.
“날 꼬집어 보거라.”
심화영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송로는 16살 때 죽었는데 송연정의 주장으로는 밖에서 자객을 만난 그녀를 지키려다가 자객들에게 목이 꿰뚫렸다고 한다.
그러나 송연정의 행태를 생각하면 송로는 아마 당시에 송연정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되어 살해당했을 것이다.
심화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가씨, 왜 우십니까? 어디 불편하십니까?”
송로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당황하더니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여 물을 마시게 했다.
심화영은 물을 조금 마신 뒤에야 정신이 살짝 돌아와서 옷깃을 열어 어깨를 보았다.
그녀의 왼쪽 어깨는 흉터 없이 매끈했다.
심화영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19살 때 삼황자 원태영을 대신하여 칼을 맞은 적이 있는데, 워낙 심하게 다친 탓에 흉측한 모양의 흉터가 왼쪽 어깨에서부터 시작하여 복부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가씨, 혹시... 어깨가 아프십니까?”
옆에 있던 단향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산에서 굴러떨어져서 뼈라도 다치신 겁니까?”
“산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심화영은 단향을 본 순간 더욱 당혹스러웠다.
이곳은 저승인 걸까?
무엇 때문에 이미 죽은 송로뿐만 아니라 단향까지 만난 걸까?
삼황자 원태영은 궁에 사람을 심어두기 위해 단향을 내시 조덕배에게 보냈고, 단향은 조덕배에게 사정없이 유린당하다가 처참히 죽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미안한 마음이 든 심화영은 갑자기 버둥거리면서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단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단향아, 미안하다!”
단향은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열이 나서 정신이 혼미하신 건가요?”
똑같이 당황한 송로를 힐끗 본 단향은 서둘러 심화영을 부축했다.
“아가씨, 간신히 깨어나셨는데 어서 침상에 누워계세요...”
심화영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는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순간 그만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거울 속 그녀는 얼굴이 빨갛고 눈이 충혈된 것이 누가 봐도 열이 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뚜렷한 것은 탄력이 넘치는 탱탱한 피부와 붉은 입술, 분홍빛이 감도는 뺨이었다. 누가 봐도 앳된 모습이었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원앙이 조각된 흰 옥이 있었다.
그 흰 옥은 바로 원태영이 계례에서 그녀에게 주었던 선물이자 맹세의 증표였다.
심화영은 그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 그 옥을 부서뜨렸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심화영은 비틀거리면서 물었다.
“오, 오늘이 혹시 원강 41년이더냐?”
“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단향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여 침상에 앉혔고, 크게 충격받은 심화영은 침상에 털썩 앉았다.
원강 41년이면 심화영이 이제 막 계례를 올린 해였다.
그해 심화영은 하루빨리 삼황자와 혼인하기 위해 그가 시키는 것은 뭐든 마다하지 않고 했다.
그러다 일주일 전 오전, 심화영은 전강훈에게 연남산으로 오라고 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할 예정이며 만약 오지 않는다면 앞으로 평생 자신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전강훈이 연남산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방에 매복하고 있던 자객들이었다.
그러나 전강훈은 무공이 아주 뛰어나 일반인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심화영은 삼황자가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려고 일부러 산에서 굴러떨어졌고 전강훈은 그녀를 구하려다가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아 두 다리를 다쳤다.
그 독은 해독약이 없었다.
명양왕부에서 천하의 명의를 모두 모셔 왔으나 그중 전강훈을 치료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결국 그 뒤로 전강훈은 영원히 바퀴 달린 의자를 사용해야 했고 더 이상 무공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심화영은 반성은커녕 송연정과 유씨 부인의 부추김 아래 며칠 뒤 대비마마의 생신연에서 공공연히 전강훈과의 혼약을 깨뜨렸다. 그 일로 명양왕부에서는 격분하였고 심씨 가문을 원수 보듯 했다.
그 뒤로 심화영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조정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적모 또한 심화영 때문에 화병이 나서 앓아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또한 큰언니는 심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내와 혼인해야 했고 결국엔 그녀도 오랫동안 우울감에 빠져 살게 되었다.
반대로 송연정과 유씨 부인은 심화영의 편에 서면서 그녀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삼황자야말로 최고의 선택지라며 끈질기게 주장했다.
심화영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래서 오만하고 무례한 말을 내뱉으며 수치도 모르고 삼황자에게 들러붙다가 결국엔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심씨 가문도 심화영 때문에 발목이 잡혀 어쩔 수 없이 삼황자가 즉위할 수 있게 그를 도와야 했다.
그 결과 심씨 가문은 풍비박산 났다.
심화영은 두려운 마음에 단향의 팔을 콱 잡으면서 물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면 명양왕 전하께서는 어떠냐? 전하께서는 괜찮으시냐?”
단향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운명하셨는지 물으시는 것입니까?”
“...”
심화영은 그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전생에 심화영이 전강훈이 죽기를 간절히 바랐던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심화영은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기에 전강훈이 심하게 다쳤던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단향은 자신의 말투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고 다시 말을 다듬어서 말하며 심화영의 희망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아주 심하게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명양왕부에서 의원이란 의원은 죄다 모셔갔는데 아직도 좋은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리께서 며칠 내내 찾아가셨는데 명양왕부의 나리께서 격분하셔서 나리를 문전박대하셨다고 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나으시지 못한다면 저희로서는 명양왕부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화영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지 고민했다.
이때 문밖에서 초조해하는 자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하지요? 송연정 아가씨께서 저희 아가씨를 꼭 만나야겠다고 합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대부인께서 본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분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송연정?
심화영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