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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최다인은 차를 미친 듯이 몰았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던지라 찬바람이 뺨을 베듯 스쳐 갔다. 바람에 스쳐 따끔거림이라도 있어야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은 이미 어둠이 졌고 집에 들어선 그녀는 어느새 공현우의 서재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공현우는 이곳을 그녀에게 감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서재 열쇠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자신의 모든 건 전부 그녀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의 개인 공간은 존중해줘야 한다며 서재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신뢰란 게 우스울 정도로 얄팍하고 헛된 것이었다. 최다인은 문을 밀어 열고 스탠드를 켰다. 묵직한 경제 금융 서적들과 프로젝트 파일들 위로 시선이 지나가다가 맨 위 칸에서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정연한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표지의 앨범 한 권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던지라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꺼냈다. 표지는 글자 하나 없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고 자주 만져진 듯 은근한 윤기가 배어 있기도 했다. 첫 장을 펼친 그 순간 최다인은 숨이 턱 막혔다. 사진 속에는 풋풋한 공현우와 홍시아가 교복을 입고 황금빛 꽃밭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공현우의 눈매는 맑고 선명했다. 그 웃음은 최다인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티 없이 밝은 웃음이었다. 포니테일 높게 묶은 홍시아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있었고 눈빛에는 사랑받는 사람 특유의 당당한 빛이 번져 있었다. 사진 옆 빈칸에는 공현우의 손 글씨도 적혀 있었다. [꽃 보러 오고 싶다길래. 고2, 여름.] 최다인은 사진을 넘길수록 마음이 더 깊이 가라앉았다. 홍시아가 무대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공현우는 객석에서 홍시아만 바라보던 날은 고3 졸업 공연 때부터 둘이 나란히 대학 정문 앞에 서서 새로운 시작을 기록한 사진, 삐진 것인지 입을 삐죽 내민 홍시아를 웃으며 달래주는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만든 치킨 평생 먹게 해줄게.] ... 앨범은 두껍지 않았지만 공현우와 홍시아의 풋풋한 시작부터 성숙해지기까지의 시간과 추억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사진마다 그의 세심한 글씨가 따라붙었다. 사소하지만 다정한 기록들이었고 소년의 진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씁쓸함이 밀려온 최다인은 목이 꽉 막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잇달아 떠올랐다. 공현우는 늘 각종 튀김을 사 왔다. 그녀가 소화기관이 약해 튀긴 것을 먹으면 속이 불편하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가 사준 원피스도 전부 몸매를 드러내는 머메이드 라인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스타일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튀김들은 전부 홍시아가 좋아하던 것이었고 머메이드 드레스는 홍시아가 즐겨 입던 스타일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최다인은 그걸 공현우의 취향이라 여기고 그의 취향에 어떻게든 맞추려고 애썼었다. 그녀가 믿어온 ‘사랑'이라는 건 사실 다른 사람의 흔적이 덧씌워진 그림자였고 그녀가 의심했던 ‘육체적 배신'은 오히려 오래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첫사랑이 이 위험한 게임 속에서 다시 불타오른 결과일 뿐이었다. 공현우와 홍시아의 이야기에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과 집안 간의 원한, 그리고 지금의 뒤틀린 집착과 복수가 얽혀 있었다. 겉보기에는 증오로 가득했지만 뿌리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최다인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끼어든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위에서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익숙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 고통은 예전에 공현우 곁에서 창업을 함께하며 자주 끼니를 거른 것도 모자라 밤샘과 술자리를 버티다가 생긴 지병이었다. 최다인은 익숙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맡 서랍에서 위약을 꺼내 찬물에 삼켰다. 약효와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상하리만큼 감정도 함께 가라앉았다. 최다인은 노트북을 열고 오래전 받아둔 메일함을 한참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거의 만료될 참이던 그때 그 이메일을 찾았다. 보낸 이는 한 글로벌 기업의 HR 이사였다. 그녀가 공우 그룹에서 보여준 전략적 통찰과 실행력을 높이 평가하며 런던 본사로 와 달라고 여러 차례 정중히 요청했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공현우와 떨어져 지내기 싫다는 이유로 계속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이메일은 그녀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가게 해주는 티켓이 되었다. 최다인은 주저하지 않고 답장을 썼다. 제안을 수락하며 최대한 빠르게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다음 달 초부터 출근 가능하다는 내용을 썼다. ‘전송'을 누르는 순간 최다인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직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으니까. 창밖은 어느새 희끄무레 밝아오고,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공현우의 눈빛에는 여전한 걱정과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최다인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대려고 했다. “안색이 왜 이래? 잠 설쳤어?” 최다인은 티 나지 않게 몸을 비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응, 악몽을 꿨어.” 그녀의 말에 공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 꿈은 다 반대라잖아.”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는 웨딩드레스 피팅이 있었지?” 최다인은 일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현우는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기분에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식장은 내가 몇 번이나 수정했으니까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최다인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 화면에 뜬, 어젯밤의 그 음성 파일 목록이 떠 있는 걸 힐끔 보고서는 재빨리 꺼버린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결혼식 날, 나도 당신한테 줄 서프라이즈 준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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