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권시아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온 집안의 결혼사진을 하나씩 떼어내게 했다.
그다음, 윤재우가 한때 자신에게 선물했던 모든 것들과 두 사람이 쓰던 커플 용품을 모조리 정리해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마당으로 나가서는 정원 한켠에 조성되어 있던, 윤재우가 일부러 그녀를 위해 심어준 치자꽃 밭으로 향했다.
그는 언젠가 치자꽃이 두 사람의 사이의 사랑처럼 순수하다고 말했었다.
권시아는 손으로 꽃 한 송이를 들어 향기를 맡았다가 다음 순간 손가락으로 꽃잎을 세차게 짓이겨 흙으로 뿌리며 떨쳐버렸다.
무표정하게 성냥에 불을 붙인 그녀는 정원 전체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꽃밭을 삼켰고 그 불빛이 권시아의 텅 빈 눈빛을 비췄다.
천천히 밀려오던 고통이 마침내 가슴 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다 못해 육체까지 아파지는 것 같았다.
뼈를 도려낸 뒤 느끼는 고통 같았다.
다행히도 사흘 뒤면 그녀는 완전히 떠날 수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 윤재우가 강채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평소보다 집이 한결 깔끔해진 것 정도만 느꼈을 뿐 아무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권시아가 짐을 싸는 모습을 본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물었다.
“여보, 왜 짐을 싸는 거야?”
권시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부모님이 며칠 해외여행 가신대. 같이 가드리려고.”
“언제인데? 내가 스케줄 좀 볼 테니까 시간 되면 같이 가줄게. 참, 채현이 아직 해외 못 가봤잖아. 이번에 같이 가자.”
“그럴까요, 시아 언니?”
강채현이 옆에서 거들며 말했다.
“저도 해외 가 보고 싶어요.”
권시아는 손을 멈추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비서님한테 당신 일정 물어봤어. 그 기간에는 고객 응대하느라 따라갈 수 없다고 하던데? 채현이도 아직 치료 중이라 편히 못 다닐 거고.”
잠시 멈칫했지만 윤재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고 결국 동행은 무산됐다.
다음 날, 공증사무소에서 권시아에게 증명서류를 찾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갑자기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코끝을 찌르는 에테르 냄새가 그녀를 기겁하게 했고 곧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깨어났을 때는 온 세상이 칠흑 같았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두 손은 케이블타이로 등 뒤에 묶여 있었으며 두 발은 밧줄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공기에는 썩은 음식 냄새가 진동했고 마치 시골의 가축 창고처럼 누린내가 났다.
햇빛이 강했던지 거칠게 짜진 검은 천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틈으로 권시아는 몸을 가까이 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중 여자의 얼굴은 그녀에게 아주 익숙했다. 바로 강채현이었다.
강채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따져 물었다.
“내가 죽여버리라고 하지 않았어? 왜 여기 데려온 거야?!”
남자의 얼굴에는 칼자국 같은 흉터가 있었는데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뿜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 팔아서 돈 벌려는 거지, 뭐. 네가 원한 건 값나가는 물건이잖아. 전에 네가 모아둔 돈으로는 턱도 없어.”
그 말에 강채현은 얼굴빛이 변해 분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다 이 빌어먹을 년 때문이잖아!”
그녀의 시선이 묶여 있는 자신 쪽으로 스쳐 지나가자 권시아는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몸을 굳혔다.
“그때 내가 그 귀중한 물건들 다 훔쳐서 팔 수 있었는데... 저년 때문에 결국 다시 놔둘 수밖에 없었어.”
강채현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 물건은 곧 도착해. 알잖아, 이쪽은 항상 돈이랑 물건을 동시에 맞바꿔야 한다는 거. 지금으로서는 저년을 이용해서 돈 좀 만들 수밖에 없어.”
칼자국이 있는 남자는 타들어 가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비벼 끄더니 땅바닥에 침을 툭 뱉었다.
“그 사람한테 연락은 했어?”
강채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직 안 했어. 네가 오길 기다렸거든. 어쨌든 현재의 넌 윤재우의 여동생이고 저 여자가 얼마짜리인지는 누구보다 네가 잘 알 거 아냐.”
잠시 생각에 잠긴 강채현이 입을 열었다.
“100억 정도면 되겠지.”
“좋아!”
남자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윤재우에게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력 도중, 그의 손이 갑자기 덜덜 떨리더니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강채현은 그가 약 기운이 떨어졌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하여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품에서 주사기를 꺼내 그의 팔에 꽂았다.
정맥으로 약물이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몸이 진정되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진심으로 고맙다면 다음에는 더 좋은 물건으로 갚으면 되겠네.”
강채현은 능숙하게 주사기를 치우며 무심하게 말했다.
남자는 히죽 웃었다.
“마침 좋은 게 있긴 해. 원래는 혼자 즐기려고 아껴둔 건데 이번에 네가 도와줬으니 한 번 맛보게 해줄게.”
그러더니 품에서 작은 봉지를 꺼냈다. 그 위에는 수염 난 광대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신상품이야. 순도 죽여줘. 한 번만 빨아도 천국 갈걸?”
강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환하게 빛났고 권시아는 숨을 죽인 채 그 둘을 주시했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몸은 느슨해지고 눈빛이 흐릿해졌다.
이에 권시아는 직감했다.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