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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문득 정신 차렸을 때 서나빈은 낯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이 낯선 공간을 바라봤다. 어제는 부서 회식이었고, 술을 그만 너무 마셔버렸다. 그다음에는... 서나빈은 손이 떨리며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남자의 무겁고 낮은 신음이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망상을 딱 잘라내고 이 미지의 장소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바닥에 나뒹구는 찢어진 흰 셔츠를 집어 들었다. ‘이걸 입고 나갈 수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옷가지를 옆으로 내던졌다. 침대 곁에는 한 벌의 깨끗한 옷이 있었다. 분명히 그 사람이 두고 간 직장용 정장 치마 세트였다. 서나빈은 어쩔 수 없이 그 옷으로 서둘러 갈아입었다. 평소 입던 스타일은 아니었고, 대충 급하게 사다 놓은 옷일 공산이 컸다.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는 말끔한데 쇄골 아래만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하... 이 남자,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신사라고? 남들 앞에 우리가 한 짓을 들킬까 봐 무서운 건가?’ 서나빈은 한숨을 쉬고 욕실에서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넓은 스위트룸 같은 곳,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생활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호텔은 아닌데, 또 호텔 같기도 했다. 서나빈은 침대 머리맡의 가방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왔다. 과연 이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문을 열자 눈앞에 거대한 거실이 펼쳐졌다. 낯익은 남자가 그녀의 시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헤드폰을 쓴 채 소파에 앉아 있었고, 무릎 위에 베개를 놓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있었다. 검은색 홈웨어 차림, 한껏 나른한 모습이었다. 방 안의 인기척을 듣고 그는 깊은 눈빛을 들어 올렸다. 상대는 다름 아닌 서나빈의 상사, 윤시헌이었다... 소문으로는 아주 금욕적인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기세로는 금욕적인 것이 아닌 수십 년 굶은 늑대 같았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려는 찰나, 윤시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회의 중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어두웠다. 서나빈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들은 것이다. “이리 와서 아침 먹어.” 윤시헌이 몸을 조금 숙이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앞의 꿀물을 밀어 테이블 위 다른 한쪽 아침 식사 앞까지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몸을 숙이는 순간 목에 남은 흔적들이 카메라에 그대로 박혀, 회의 중인 임원들에게 낱낱이 보였다는 것을 말이다. 서나빈의 얼굴은 긴장으로 활활 달아올랐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남긴 흔적일 것이다. 차라리 이곳이 호텔이었다면 문만 열면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덜덜 떨며 자리에 앉았다.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고, 그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꿀물을 마시고, 테이블 위의 그와 똑같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윤시헌은 냉정하기로 유명했다. 성격도, 성질도, 그냥 사람 자체가 냉랭했다. 그러니 서나빈은 단단한 철판을 걷어찬 셈이었다. 어젯밤 그녀는 분명히 차를 잘못 탔다. 그런데 아무리 잘못 탔다고 해도, 이 냉면 같은 상사가 사람을 잘못 볼 리는 없을 텐데... ‘직원이랑 잤다니... 이 인간 자기 명성은 신경 안 쓰나?’ 15분 뒤, 윤시헌은 회의를 마치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야 느긋하게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미안. 나는 네가 처음인 줄 몰랐어. 아팠지?” 그는 여전히 차가웠다. 조금 전 회의 결론을 말하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컥컥...” 마음을 겨우 고른 서나빈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잤으면 잔 거야. 더는 떠올리지 말자, 됐어!’ “의사가 곧 올 거야. 좀 있다가 돌아가.” ‘좋아, 이제 본론에 들어가네. 내가 용의 씨를 품어서 왕위를 물려받을까 봐, 그게 그렇게 무서운 건가.’ 서나빈은 마지막 한 모금의 우유를 단숨에 비워냈다.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 그는 금세 식사를 끝냈다. “여기서 기다려. 나는 오늘 회사에 가야 해. 심 비서한테 너를 데려다주라고 할게.” 서나빈은 다급히 막았다. “대표님, 저 혼자 가도 돼요. 번거롭게 심 비서 부르지 마세요.” “혹시 어젯밤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윤시헌이 시선을 살짝 들었다. 약간 억울해 보였다. “네?!” 왠지 모르게 서나빈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내가 어찌 감히...’ 그녀는 말문이 막혀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말싸움에서 짓눌린 건 처음이었다. 윤시헌이 상사만 아니었으면 벌써 뒤집고 그의 입부터 찢어놨을 거다. “대표님, 남 선생님 오셨어요.” 조금 연배 있는 도우미가 옆에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서나빈을 바라봤다. 서나빈은 생김새가 예뻤다. 하얗고 말간 피부, 예쁜 금발... 금발은 그녀가 혼혈인 덕분에 타고난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몸매도 출중했다. 딱 남들이 여자친구로 삼고 싶어 할 타입이었다. 윤시헌의 시선에 그녀는 몹시 불편했다. 원래도 붉던 그녀의 뺨에서 몸까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따라와.” 윤시헌이 입을 떼며 거의 들리지 않게 코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나빈은 얌전히 말을 들었다. 이미 패션계의 거물을 건드려버린 꼴이니까. 어젯밤 광란의 전장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질려버렸다. 그 침대를 보는 순간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하지만 그 전장은 조금 전 도우미가 이미 말끔히 정리해 놓았다. 곧 여의사가 들어왔고, 이어 윤시헌은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서나빈은 피임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도 연고를 바르니 훨씬 나아졌다. 그녀는 내내 얼굴을 감쌌다.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오자 윤시헌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심지원뿐이었다. 심지원은 그녀와 동갑, 둘 다 22살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을 졸업했고, 같은 때에 면접을 보고, 같은 날에 입사했다. 다만 맡은 일만 다를 뿐이었다. 그는 윤시헌 곁의 유일한 비서, 믿을 만한 오른팔이었다. 서나빈은 차 옆에 서서 운전석에서 히죽거리는 심지원을 바라봤다. 체면이 바닥에 쏟아져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차에 오른 다음 서나빈은 머리를 유리창에 대고 중얼거리듯 물었다. “어젯밤 제가 차를 잘못 탄 거 맞죠?” “맞아요, 미래의 사모님.” 심지원이 빈정대고는 감정을 듬뿍 실어 묘사를 시작했다. “나빈 씨를 그렇게 오래 봤는데,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건 처음 봤어요. 어젯밤 나빈 씨는 차를 잘못 탔고, 들어오자마자 대표님을 끌어안더니 갑자기 키스를 퍼부었죠.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어젯밤 대표님도 좀 마시기는 했지만 꿈쩍도 못 했어요. 알잖아요, 대표님 결벽증 있는 거. 나빈 씨가 셔츠를 잡아 찢어서 단추도 몇 개나 날아갔어요.” “...” 서나빈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렸다. “원래는 제가 나빈 씨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혼자 사니까 자기 상태를 제대로 못 가늠할까 봐 대표님이 자기 집으로 모셨어요.” “하하...”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그래서 나빈 씨랑 대표님...” 심지원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행히 윤시헌은 선경지명이 있었다. 목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보다시피.” 그녀는 자기의 말끔한 목을 가리켰다. “대표님도 참 성인군자네요.” “그렇죠...” 서나빈은 말끝을 흐렸다. ‘성인군자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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