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서나빈이 대표이사실에 불려 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점심에 회사 10층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등 뒤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따라붙었고, 그 덕에 원고 도둑 사건이 더 사실처럼 굳어졌다.
그래도 서나빈의 젓가락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맞은편의 남서진을 보며 말했다.
“부장님, 모레부터 휴가를 좀 내고 싶어요.”
그녀가 지쳐 보이는 얼굴인 데다가 오전의 일도 있어 남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의 연이정도 급히 거들었다.
“맞아. 일단 쉬자. CCTV만 복구되면 다 괜찮을 거야.”
“이 일 때문에 쉬는 건 아니에요. 쉬기 전에 이 일은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회사에 폐 끼치지도 않을 거고요. 그냥 좀 피곤해서 쉬려는 거예요.”
더 설명하지 않은 서나빈은 휴대폰을 꺼내 윤시헌에게 카톡 정산을 보냈다. ‘아침값’이라는 메모도 추가했다.
위층에서 회의 중이던 윤시헌의 폰이 띵 하고 울렸다.
긴장된 공기에 다들 누가 감히 휴대폰을 안 껐냐고 식은땀을 훔치는 사이, 윤시헌은 카톡을 열었다.
정산 문자를 보자 그는 푹 하고 웃음이 샜다. 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얼굴로 모였다.
윤시헌이 웃다니,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심지원은 모든 상황을 짐작했다.
“회의는 오후에 계속하죠.”
윤시헌은 손가락으로 톡 클릭해 만 원을 받았다.
...
“인사부 말 들어보니까 대표이사실 쪽에서 비서를 뽑는다더라. 그것도 여직원으로 찍어서.”
식사를 마친 연이정이 방금 옆을 지나간 HR을 힐끗 보고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얼음장 같던 우리 대표님이 드디어 녹아내리는 건가?”
‘하... 녹기는 무슨. 만 원짜리 정산도 받는 대표님이신데 용접불을 가져와도 쉽지 않을 거야.’
서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이정과 헤어진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안에서 지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 만나지 못한 이유는 차가 말썽을 부려서였다고 둘러댔다. 겸사겸사 차를 정비소에 맡겨 달라고 부탁도 했다.
더 흥미로운 건 어젯밤 유민정과 지형우가 마주쳤다는 사실이었다. 둘은 서나빈이 볼까 봐 일부러 평범한 친구인 척 연기를 했다.
지형우는 영화관 앞에서 밤을 꼬박 새웠고, 끝내 서나빈 대신 유민정의 비아냥만 받았다.
그는 연기는 잘했다. 그리고 서나빈에게 완전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부탁은 단번에 수락했다.
‘그래야지. 양심 아플 짓을 한 사람은 비탈만 만들어 주면, 당나귀보다도 더 빨리 내려가는 법이니까.’
운전석에서 서나빈은 핀홀 카메라 각도를 다시 맞추고 화장도 손봤다. 그리고 아침에 훑어본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 표정은 평범했다. 다만 한 명...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구경꾼처럼 지켜보던 그 얼굴이 유독 박혔다.
문지아. 운송부 부장의 딸, 디자인부의 중추였다.
평소에는 돈도 있고, 자잘한 선물로 친구 맺는 걸 잘해서인지 다들 문지아와 잘 지냈다. 외모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서나빈은 성급히 판단하지 않았다.
...
퇴근 시간. 서나빈은 10분 먼저 빠져나왔다. LS 패션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일찍 사라진 셈이었다.
차 안에서 검은색 윈드브레이커와 바지를 갈아입고, 엘리베이터 근처 그늘에 숨어 퇴근 차량을 살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수시로 셔터를 눌렀다. 한 장도 놓치지 않으려는 기세였다.
곧 하이힐 소리를 내며 문지아가 나왔다. 그녀는 BMW 290에 올라 서서히 빠져나갔다.
의심은 확신으로 기울었다.
몇 분간 생각을 정리하던 서나빈은 엘리베이터 옆 모퉁이에서 몸을 빼냈다.
하지만 급히 걷다가 막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그림자와 부딪쳤다.
37 사이즈 하얀 캔버스화가 42 사이즈 구두 끝에 걸렸고,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단단한 팔이 서나빈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더니 번쩍 들어 품에 끌어당겼다. 그녀는 강철 같은 가슴팍에 부딪쳤고, 머리를 묶은 고무줄이 요란하게 끊어지며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본능적으로 그의 셔츠를 움켜쥐자, 단추 두 개가 튀어 나가 그녀의 미간에 딱 하고 부딪쳤다.
“아!”
이마가 아려서 고개를 그의 가슴에 박았다. 은은한 단향이 한껏 밀려왔다.
겨우 자세를 추스르고 미간을 문지른 뒤에야 생명의 은인을 올려다봤다.
“대, 대표님...”
앵두 같은 입술에서 중얼거림이 흘렀고 볼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작은 손 아래에서 그의 호흡에 맞춰 가슴이 미세하게 울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심지원은 고개를 살짝 틀어 못 본 체했다.
약한 조명 아래, 윤시헌은 흩어진 금발을 스쳐보다가 결국 자신의 가슴팍 찢어진 셔츠로 눈을 내렸다. 벌어진 틈 사이로 고른 쇄골과 단단한 흉근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네가 찢은 셔츠, 이걸로 두 개째야.”
표정 하나 없이 스치듯 말할 뿐이었다.
맞다, 두 개째. 첫 번째는 차 안에서 찢은 것이었다.
윤시헌은 천천히 서나빈의 허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서나빈은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레 그의 옷깃을 여미고 넥타이를 다듬었다.
윤시헌은 꼼짝도 못 했다. 작은 손이 스칠 때마다 열이 전신으로 번졌다. 눈길이 흐릿해져 서나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정돈을 마친 서나빈은 두 걸음 물러나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대표님!”
그는 말없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더니 휴대폰을 서나빈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받아 들며 급히 인사하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핸들에 댔다.
‘망했어! 요즘 삼재라도 끼었나? 자꾸 대표님이랑 얽히네. 그리고 이 못난 얼굴은 왜 계속 빨개지는 건데!’
서나빈은 한참을 진정했다.
윤시헌이 떠난 걸 확인하자, 그녀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탔다.
탕비실에서 커피 두 잔을 내리고, 수면제 한 알을 반으로 쪼개 각각에 떨어뜨렸다.
엘리베이터가 2층에 멈추자, 관리실로 가서 문 앞에 커피를 놓고 똑똑똑 세 번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경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사람 없는 걸 확인했다. 따끈한 커피 두 잔과 위에 붙은 쪽지에는 ‘수고하셨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웃으며 커피를 들고 문을 닫았다.
대략 10분 후, 서나빈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안쪽은 고요했다.
서나빈은 주위를 한 번 더 살핀 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CCTV는 고장 난 게 아니었다. 일부가 잘려 있었을 뿐이다.
서나빈은 컴퓨터 바탕화면의 휴지통에서 삭제된 영상을 찾아냈고, 바로 백업을 떠서 흔적 없이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 컵라면을 불리며 백업 영상을 돌렸다. 역시 문지아였다.
새벽 한 시 조금 넘은 시각. 지하 주차장에서 허겁지겁 차를 몰고 나가는 장면이 똑똑히 찍혔다.
“망했다. 혹시 내가 대표님이랑 있는 거 본 거 아니야...?”
윤시헌을 떠올리는 순간 볼이 이유 없이 달아올랐다.
문지아의 아버지와 윤시헌은 협력 관계였다. LS 패션의 물류는 문씨 가문이 맡았다.
‘이걸 터뜨리면 대표님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서나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섣불리 굴면 안 되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는 컵라면을 들어 한숨을 내쉬고, 영화를 틀어 소파에 기대 여유롭게 젓가락을 놀렸다.
그때 소파 옆에 놓인 윤시헌의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