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방으로 돌아온 온지아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온몸에 남은 한기와 더러운 기억들을 씻어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 심주원이 손에 악보를 든 채 그녀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온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가 단숨에 악보를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숨김없는 차가움이 담겨 있었고 그 소리에 심주원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불편한 기색을 억누르고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곡, 벌써 보름은 넘게 붙잡고 있었잖아? 아직도 다 못 쓴 거야?”
그 말에 온지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분명 강하늘 쪽에서 곡을 재촉한 거겠지.’
“요즘은 별로 곡을 쓸 기분이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악보를 정리해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왜 내가 쓰는 곡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졌어?”
심주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돌려 입 모양이 보이도록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곡을 쓰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그리고 의사도 말했지. 작곡 같은 창작 활동이 청각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그러면서 다정하게 그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이 곡, 빨리 완성해. 네가 그랬잖아, 내 동생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네가 다 쓰면 내가 직접 데려가서 내 동생이랑 그의 친구도 소개시켜줄게. 어때?”
예전의 온지아라면 이 말에 마음이 설렜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의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저 혐오스럽고 속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활짝 웃었다.
“좋아.”
싱긋 웃으며 심주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안엔 치밀한 계산이 서려 있었다.
“며칠만 시간 줘. 최대한 빨리 완성할게. 대신 그 며칠 동안은 누구도 날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았어.”
그의 목소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마침 며칠간 친구가 귀국해서 같이 있어 줘야 하거든. 너는 네 곡을 쓰는 데만 집중해.”
온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그녀의 투명한 눈빛과 예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한 심주원은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고 천천히 입을 맞추려 다가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온지아는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좀 전에 물에 빠져서 그런가 아직 몸이 안 좋아. 오늘은 그냥 쉬고 싶어.”
그 말에 심주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당황한 듯한 눈빛이 스쳤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푹 쉬어.”
그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을 나섰다.
며칠 동안, 심주원도 심주혁도 온지아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의 SNS를 통해 그들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심주원은 강하늘과 함께 타워빌딩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보았고 음악회에 참석해 그녀 곁을 지켰다.
자선 만찬회에서는 가장 비싼 보석을 낙찰받아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고 한밤중엔 도시 전체를 뒤덮는 불꽃놀이까지 준비했다.
오직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에 질세라 심주혁은 조예원과 함께 드라이브를 다니고 고급 리조트에 묵으며 산책과 등산을 즐겼고 해상 파티를 위해 호화 유람선을 통째로 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아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이 도시를 떠나기 이틀 전, 온지아는 심주원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 심주원과 심주혁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강하늘 양옆에 자리 잡고 있었고 손엔 각기 다른 맛의 케이크 상자를 들고 그녀에게 떠먹이고 있었다.
“주원 오빠, 이 딸기 케이크 너무 달아서 못 먹겠어.”
“주혁 오빠는 진짜... 여전히 성격 급해! 크림이 내 얼굴에 다 묻었잖아!”
강하늘의 달콤한 애교 섞인 목소리와 두 형제의 너털웃음이 사무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진짜 나 못 먹겠어...”
강하늘이 투정 부리듯 말하던 그 순간, 문가에 서 있는 온지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
“어머, 몸은 불편해도 의지는 강한 귀머거리 작곡가님 오셨네?”
그 말에 심주원과 심주혁 모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강하늘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마다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곤 했다.
잠시 후, 심주혁이 심주원을 흘끗 바라봤다.
“낮에는 형이 담당이잖아.”
그 말에 심주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마지못한 듯 강하늘 곁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온지아에게 다가갔다.
“지아야.”
언제나처럼 다정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 앞에 섰다.
“네가 그렇게 보고 싶다던 내 동생, 기억나지? 심주혁.”
그는 손가락으로 심주혁을 가리켰다.
“그리고 옆에 있는 건... 굳이 소개 안 해도 알겠지? 요즘 막 핫한 연예인, 조예원 씨야.”
그 말과 함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온지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여자친구, 온지아야.”
온지아는 억지로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꾹 눌렀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시선이 조용히 소파 쪽으로 향했다.
심주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일부러 큰 입 모양을 내보였다.
“형, 여자친구... 꽤 예쁘다?”
그 표정과 그 제스처, 모든 게 어설프고 모든 게 익숙했다.
온지아는 마음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제가 못 듣는다는 걸 알고 처음 뵙자마자 형처럼 입 모양까지 따라 해주시고.”
그 말이 떨어지자 사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심주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입을 꾹 다물며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젠장. 습관 돼서 그만...”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심주원이 재빨리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지아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온지아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악보를 꺼내 내밀었다.
“곡, 완성됐거든. 알려주려고 온 거야.”
“보여줘 봐!”
강하늘이 반쯤 들뜬 얼굴로 악보를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와... 이번 곡 진짜 좋다! 예전보다 훨씬 더!”
온지아는 조용히 웃었다.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지. 이 곡은 내가 며칠 밤낮을 새워, 장 교수님의 데뷔작을 기반으로 정교하게 변주한 곡이니까.’
“봐봐, 내가 뭐랬어? 걱정할 거 없다고 했잖아.”
강하늘은 심주원을 향해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청력 잃었다고 작곡까지 못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러고는 콧소리를 섞어 말했다.
“오빠, 며칠 뒤에 얘 데리고 병원 가서 진료받는 척하면서 아예 귀 망가뜨려 버리면 어때?”
“약만 먹이는 건 솔직히 불안하거든. 언제 약 끊고 다시 들리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다 우리가 곡 훔친 거 다 들켜버리면 어쩔 거야?”
그녀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는 말에 온지아는 담담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