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정다혜는 남편의 소꿉친구와 함께 납치당했다. 그날 밤 창고에서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한 달 후 그녀들은 동시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꿉친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유하준은 망설임 없이 나서서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다혜의 아이에게는 납치범들에게 윤간당한 뒤 생긴 잡것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수며 절규했다.
“왜 그래? 너 분명 알고 있잖아! 이 아이는 납치되기 전에 생긴 아이라고! 납치범들은 나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그의 눈빛에는 고통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다혜야, 조금만 참아 줘. 채린이는 어릴 적부터 귀하게 자라서 험담과 소문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정다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눈가에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그럼... 나는 견딜 수 있다는 거야?”
그 순간 그녀는 문득 몹시 지친다고 느꼈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그를 사랑할 마음조차 사라졌다.
법률사무소에서 정다혜는 모든 서류에 서명을 마친 후 남자 쪽의 빈 서명란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변호사에게 물었다.
“남자 쪽 이름을 제가 대신 써도 될까요?”
변호사는 약간 난처한 듯 안경을 고치며 말했다.
“본인 동의가 없는 한 어렵습니다.”
잠시 침묵한 그녀는 유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민채린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준 오빠, 나 강서구에 있는 그 디저트 가게의 디저트를 먹고 싶어...”
정다혜는 가슴이 찔리는 듯 아팠지만 여전히 최대한 평정을 유지했다.
곧 전화 너머에서 유하준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혜야, 무슨 일이야? 지금 내가 좀 바빠서, 모든 일은 네가 알아서 결정해.”
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모든 일을 대신 결정해도 돼?”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결혼한 후로 집안에 모든 일을 다 네가 결정한 거 아니었어?”
“알겠어. 그럼 이 일은 내가 스스로 결정할게.”
전화를 끊은 정다혜는 고개를 숙여 빈 서명란에 한 획 한 획 무게감 있게 유하준이라는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정다혜를 배웅하며 법률사무소를 나서던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모님, 이혼 합의서는 3개월 후에 효력이 발생합니다. 이 기간에 후회하시면 언제든지 철회하실 수 있어요.”
그녀는 문득 가볍게 웃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이혼할 거야.’
법률사무소를 나온 그녀는 또다시 택시를 타고 다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이를 지우려고 해요.”
“정말 아이를 지울 건가요?”
의사는 검사 결과지를 힐끗 보며 말했다.
“아이는 현재 매우 건강해요.”
“네, 확실해요.”
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의료 기구들이 부딪히는 차가운 금속 소리가 그녀의 온몸을 한기로 휘감았다.
눈을 감은 그녀는 유하준이 예전에 자신을 쫓아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학생회장으로 축사하던 그는 첫눈에 그녀를 보고 말을 잃었다.
그 뒤로 모두가 금융학과 킹카가 제대로 빠져버렸다고 말했다.
여자를 눈여겨 본 적 없던 고고한 그가 한 여자를 무려 1년 동안 쫓아다녔다.
첫눈이 내리던 날 그는 여자 기숙사 아래에 장미 999송이를 깔아놓고 눈 속에서 하룻밤을 기다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그녀가 무심코 강서구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차를 몰고 도시 절반을 가로질러 갔다.
그러나 그녀를 완전히 빠져들게 만든 것은 바로 그 학교 축제였다.
그녀가 피아노 독주를 하다가 연주 도중 건반이 끼이는 사고가 발생해 연회장 전체가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순간 유하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그녀 곁에 앉았다.
“나와 함께 해.”
그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건반 위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그녀와 함께 꿈속의 결혼식이라는 곡을 끝까지 연주해 냈다.
무대 아래의 함성은 천장을 뚫을 듯했지만 그는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정다혜, 나는 평생 너 아니면 안 돼.”
그렇게 그녀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 또한 약속을 지켜 연애부터 결혼까지 줄곧 그녀를 진주처럼 소중히 여겼다.
마음에 걸리는 단 한 가지는 오랫동안 줄곧 그를 따라다니는 소꿉친구 민채린이었다.
“채린이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야.”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채린이의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주셨어. 지금 민씨 가문이 몰락한 상황이라 내가 채린이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민채린은 점차 그들 사이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갔다.
수많은 순간에 그녀는 민채린에게 양보해야 했다.
작년 생일에는 그가 그녀와 함께 오로라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지만 민채린이 갑자기 열이 나는 바람에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결혼기념일에 그녀는 많은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지만 그는 민채린이 천둥이 무섭다는 전화 한 통에 가버렸다.
그녀가 39도 고열에 시달릴 때도 그는 민채린과 함께 대관람차를 타며 그녀가 SNS에 게시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또 한 번 참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민채린 때문에 그들의 아이까지 부정했다.
그렇다면 그녀도 이 아이가 필요 없었다.
그녀는 그도 이제는 필요 없었다.
수술실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 정다혜는 마치 자신의 영혼까지 같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벽에 의지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리는 여전히 살짝 떨리고 있었으며 하복부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복도 모퉁이를 돌던 그녀의 발걸음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혈액이 응고되는 듯한 한기에 휩싸였다.
벤치에서 유하준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민채린의 살짝 볼록해진 배에 귀를 대고 있었다.
“아기가 나를 찼어!”
눈초리가 살짝 휘어진 민채린은 환하게 웃었다.
“하준 오빠, 엄마 배를 더 세게 찰수록 아기가 더 똑똑하다고 들었어.”
유하준은 부드럽게 민채린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방울이 스며들듯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저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정다혜는 손에 쥔 진료 기록부를 꽉 움켜잡았다.
종이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바스러질 듯한 소리를 냈다. 마치 지금 그녀의 산산조각 난 심장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달려가서 따져 물어야 했다.
그가 다른 사람의 아이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순간 그들 자신의 아이는 차가운 의료 기구에 의해 살과 피가 갈기갈기 분리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에게 물어야 했다.
그가 예전에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역시 이렇게 기뻐서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던 것을 기억하는지 말이다.
그러나 정다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서서 햇빛 아래에 빛나는 민채린과 유하준을 바라보았다.
모든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미련은 결국 모두 깊은 지침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뒤에서 유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혜야!”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당혹감이 스쳤다.
“왜 병원에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