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 말이 떨어지자 현장은 한순간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뜬 채 방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박한섭 때문에 죽고 못 살던 그 신채이가... 이제 박한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채이에게 꽂혔다. 충격받은 듯한 기색이 모두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으나 단 한 사람, 박한섭만은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그녀의 앞에 서서 미동도 없이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냉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밀당... 도대체 이제 몇 번째야?”
차가운 목소리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말했지. 네가 어떻게 날뛰든 아무 소용 없다고.”
그는 몸을 살짝 굽혀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얇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신채이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으려는 듯 또박또박 말이 흘러나왔다.
“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 말이 끝나자 주위의 손님들은 그제야 충격에서 깨어났다는 듯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신채이가 어떻게 갑자기 박 대표님을 안 좋아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까. 예전에는 박 대표님이 자기 쳐다봐주길 바라고 자살 시도만 백여 번을 했었잖아.”
“참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신채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깊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입술로 다시 한번 말하려 했다.
‘밀당이 아닌데... 진짜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정훈이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희가 애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곳에서조차 집안 망신살이 뻗치네요. 남의 물건이나 훔치다니...”
그는 차갑게 손을 내저으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저년 끌고 가서 호텔 냉동창고에 처넣어. 얼어 죽기 싫으면 정신 차릴 거니까.”
이에 신채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저... 훔친 적 없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경호원 두 명이 달려와 신채이의 손목을 꺾듯 거칠게 붙잡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보았지만 바로 그때, 뒤통수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쇠봉으로 세게 얻어맞은 충격에 신채이는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갔고 시야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박한섭의 눈이었다.
그는 그저 차갑게,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선 채 신채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신채이가 다시 눈을 뜬 건,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몸을 가득 채운 뒤였다.
속눈썹에는 성에가 끼어 있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몸은 이미 얼어붙어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혈액마저 멈춘 것처럼 손발이 굳어 있었다.
냉동창고 안은 영하 30도였으나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건 얇은 슬립 하나뿐이었고 드러난 피부는 이미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죽으면... 안 돼...”
그녀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몸을 움직였다.
“나는... 죽을 수 없어...”
‘곧 이민 서류가 나오잖아.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날 수 있는데...
정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데...’
신채이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 문 쪽으로 기어가서는 보라색으로 변한 손가락으로 두꺼운 철문을 있는 힘껏 두드렸다.
“살... 려...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목소리가 이미 갈라지고 쉬어 있어 알아듣기 힘들었는지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 두드려.”
그러다 문 너머에서 웃음기 섞인, 한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채이의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바로 신소은이었다.
“지금 다들 내 생일 파티 챙기느라 바쁜데... 누가 널 신경 써주겠어?”
신소은은 작게 웃으며 말했고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우월감이 묻어 있었다.
“아, 맞다.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오늘... 네 생일이기도 하지? 그런데 아무도 기억 못 하더라.”
신채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입안에 피 맛이 번졌다.
“나는 화려한 파티장에서 모두의 축하를 받고 있는데 넌 여기서 반쯤 얼어 죽어가고...”
신소은이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신채이, 네가 친딸이면 어떻고 내가 고아원 출신이면 또 어때? 결국 너는 내 발밑에 있잖아.”
신채이가 눈을 감자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신소은이 일부러 스피커폰을 켠 듯, 전화 속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소은아, 어디 있어?”
박한섭이었다.
한없이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는 신채이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온기가 실려 있었다.
“머리가 좀 아파서... 휴게실에 있어...”
갑자기 신소은이 나긋하고 연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기서 기다려. 금방 갈게.”
전화를 끊자 냉동창고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박한섭이 신소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걸 듣고 있던 신채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자신이 그동안 일기장에 적었던 수많은 밤들이 떠올랐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눈물에 번진 글자들, 한 자 한 자 모두 그녀가 직접 새긴 절망의 기록이었다.
그녀는 썼다.
박한섭이 신소은의 생일에 눈을 보여주려고 회전 레스토랑 전체를 통째로 예약했던 날을.
신소은이 열이 나 쓰러졌을 때, 그가 밤새 곁을 지키느라 회사 상장식까지 빠졌던 일을.
신소은을 바라볼 때, 봄눈처럼 녹아내리던 박한섭의 그 다정한 눈빛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볼 때, 남겨진 건 오직 차갑게 얼어붙은 서리 같은 표정뿐이었다는 사실을...
그 길고 긴 날들 동안 신채이는 그저 초라한 구경꾼이었다.
그들 사이의 사랑을 어둠 속에서 몰래 엿보는 비참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신채이는 박한섭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떠오르자 신채이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