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뭘 웃어!”
정해성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속이 뒤집혀 더욱 분노했다.
고개를 든 정다은의 눈빛은 칼날처럼 차가워졌다.
그녀는 여전히 약한 척하는 정하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연기하는 게 그렇게 좋아? 그럼 실컷 연기하게 해주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화장대 위의 금속 펜을 잡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정하나가 바닥을 짚고 있던 손등에 맹렬하게 찔렀다.
“악!”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펜 끝이 정하나의 손바닥을 꿰뚫어 그녀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했다.
빨간 피가 순식간에 솟구쳤다.
“너! 너 미쳤어? 사이코패스야?”
정해성은 온몸을 떨며 문을 가리켰다.
“나가!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이 집은 너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그는 가정부들을 불러 강제로 그녀를 별장에서 끌어내라고 하고는 그녀의 작은 여행 가방과 함께 현관 밖에 던져버렸다.
정다은은 비틀거리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아픈 팔뚝을 문지른 후 몸을 숙여 여행 가방에서 방금 되찾은 어머니의 파란 보석 목걸이를 꺼내 손안에 꽉 쥐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화려하지만 차가운 이 별장을 한번 쳐다보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멀리 가지도 못했는데 하늘에서 예고 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콩알만 한 빗방울이 떨어지며 순식간에 그녀를 흠뻑 적셨다.
초봄의 한기가 젖은 옷을 뚫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녀는 추위에 떨며, 거리의 가게 처마 밑으로 비참하게 뛰어들어 비를 피했다.
빗물이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흐릿한 빗줄기를 바라보며 마음속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그때, 익숙한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천천히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오더니 김현석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옆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처마 밑에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비참한 모습을 한 정다은을 보고는 순식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차 문을 열고 내려 몇 걸음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차에 타.”
“김현석 씨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
정다은은 고개를 돌렸다.
김현석은 더는 그녀와 말씨름하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거의 강제로 조수석에 태워졌다.
차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아 그녀의 몸에 밴 한기를 몰아냈다.
김현석은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고는 조용히 차를 몰아 그녀를 자신의 공관으로 데려갔다.
그는 자신의 깨끗한 셔츠와 바지를 꺼내 그녀에게 갈아입게 했고, 또 구급상자를 찾아와 이미 멍이 들고 퍼렇게 변한 그녀의 뺨에 약을 발라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묻더니 시선을 그녀의 붉고 부은 뺨과 축축하고 유난히 연약해 보이는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정다은은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않으려 않았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김현석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손에 두꺼운 붕대를 감고 얼굴이 창백한 정하나가 서 있었다.
“현석 오빠...”
정하나는 그를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
“언니가 아버지께 쫓겨났어요. 너무 걱정돼서... 언니가 지난번에 절 죽일 뻔했고, 이번엔 또 펜으로... 제 손을 찔렀지만 우리는 결국 친자매잖아요. 전 언니가 걱정돼서 언니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요...”
거실에서 이 말을 들은 정다은은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문으로 다가가 정하나를 냉담하게 노려보았다.
“정하나, 내 앞에서 그 역겨운 연극을 또 하면 지금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
“정다은!”
김현석의 얼굴이 굳어졌고,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난동을 부릴 거야? 사람을 때리고, 밀고, 펜으로 손바닥을 찌르고! 이 중에 여자가 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 하나는 너그럽게 너를 용서하고 너를 집으로 데려가려 찾아왔는데 너는 동생을 그렇게 대하는 거야?”
정하나는 즉시 앞으로 나서 김현석의 소매를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현석 오빠, 괜찮아요. 언니가 저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도 돼요...”
“하나에게 사과해.”
김현석은 정다은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그럴 수 없어요.”
정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김현석은 정다은을 잡아끌려 했지만 정다은은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
몸싸움하는 중에, 김현석의 팔이 실수로 현관장에 놓여 있던 보온 물통에 부딪혔다.
쾅!
보온 물통은 땅에 떨어지며 순식간에 폭발했고,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김현석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있던 정하나를 품에 꽉 안고 자신의 등 뒤로 튀는 대부분의 뜨거운 물을 막았다.
한편 반대편에 서 있던 정다은은 피할 겨를도 없었기에 뜨거운 물이 그녀의 몸 절반을 덮쳤고, 종아리에서 팔까지 순식간에 작열감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숙였고 얼굴은 종이처럼 하얗게 질렸다.
김현석은 품 안에 있던 정하나를 빠르게 확인했다.
그녀의 손등에 몇 방울 튀어 약간 붉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그녀를 놓고 그제야 다른 쪽에서 고통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정다은을 보았다.
그녀의 드러난 피부는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라 끔찍해 보였다.
그는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려 했다.
“현석 오빠!”
정하나는 황급히 그의 팔을 잡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냥 좀 아플 뿐이에요... 그런데 언니... 언니는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먼저 언니 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현석은 발걸음을 멈추고 정다은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정하나의 이해심 많은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정다은의 이전 ‘악행’을 떠올린 그의 깊은 눈빛은 결국 차갑고 단단해졌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몸을 숙여 정하나를 안아 올리며 어떤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다은에게도 좀 고생할 기회를 주는 게 나을 거야. 그래야 나중에... 너를 함부로 해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을 마친 그는 정하나를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