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업계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송유진은 배도현의 가장 충성스러운 ‘개’라고.
배도현에게 수없이 무시당해도 그의 전화 한 통이면 송유진은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
모두 그녀를 비웃었다. 배도현이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스스로 초라해지려고 하냐면서.
배도현의 친구들조차 장난스럽게 말했다.
“도현아, 송유진이 진짜 널 사랑하나 보다. 결혼은 언제쯤 할 거야?”
그러면 배도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보잘 것 없는 게 어딜 넘봐?”
그 말이 나온 순간 송유진은 마침 VIP룸 문 앞에서 문을 열려던 중이었다.
송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보잘 것 없다고?’
‘그런데 배도현, 너도 별거 없어.’
송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끌벅적했던 룸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30분 전 배도현은 그와 냉전 중이던 송유진에게 전화해서 술집으로 오라고 했다.
어제 그가 송유진에게 호텔로 콘돔을 가져와 달라고 시켰던 일로 두 사람은 심하게 다퉜었다.
그래서 모두가 내기를 걸었다. 이번엔 아무리 송유진이라도 오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그녀는 왔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진짜 미친 충성심이라고.
하지만 송유진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아무런 표정 없이 배도현을 향해 걸어갔다.
배도현은 룸 중앙의 소파에 앉아 있었고 양 옆엔 화끈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붙어 있었다.
송유진은 배도현의 얼굴에 시선이 닿는 순간 가슴에 차올랐던 화가 사그라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자연스레 부드러워졌다.
송유진은 배도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차분히 말했다.
“잠깐만 자리 좀 비켜줄래요?”
여자는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깔보듯 위아래로 훑었다.
“그쪽이 뭔데요?”
그러나 송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자 여자는 더욱 능글맞게 웃으며 배도현에게 몸을 밀착시켰고 그의 손목을 잡으면서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도현 오빠, 이 여자가 아까 다들 말했던 그 충성스러운 ‘개’예요? 생각보다 무섭네요.”
배도현은 송유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오른쪽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왜? 기분 안 좋아졌어?”
그러자 여자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현은 나직이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럼 쟤더러 너한테 사과하라고 할까?”
그 말에 여자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요! 사과 듣고 싶어요!”
그제야 배도현은 송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과해.”
하지만 송유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배도현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X발. 송유진, 너 귀 먹었어? 내가 사과하라고 했잖아.”
그의 화난 목소리에 송유진은 눈빛이 흔들렸다.
“화내지 마.”
배도현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면 송유진의 기억 속 사람과 많이 다르니까.
배도현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고 거만하게 말했다.
“그럼 화나게 하지 말고 빨리 사과해.”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송유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히 공간을 채웠다.
“미안해요.”
그러자 배도현은 그녀를 무시한 채 옆에 있는 여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제 됐어?”
그러나 여자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녀도 배도현이 송유진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진심이 안 느껴져요.”
배도현이 다정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여자는 눈알을 굴리더니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샴페인을 가리켰다.
“사과를 하려면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저기 있는 술 전부 마시면 인정해 줄게요.”
룸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테이블 위의 있는 것은 모두 독한 도수의 술이었다. 남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는데 하물며 여자인 송유진이 그걸 다 마신다면...
송유진은 아무 말 없이 배도현을 바라봤다.
그는 옆에 있는 여자의 허리를 감싼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자 송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송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내가 이걸 다 마시길 바라는 거야?”
배도현은 순간 움찔했다.
그는 송유진의 위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요 몇 년간 그를 대신해 술을 막아주면서 생긴 후유증이었다.
지난번에 송유진이 또다시 배도현 대신 술을 마시다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가 위세척을 했었는데 그 후로 배도현은 어느 정도 행동을 자제했고 더 이상 그녀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송유진이 자신을 떠보듯 행동하는 모습을 보자 배도현의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먼저 기분 나쁘게 했잖아. 그러니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지.”
송유진은 배도현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 속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보니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
‘이젠 안 닮았어...’
그리고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지만 술만 마시는 건 너무 성의 없잖아. 매운맛도 곁들여야지.”
송유진은 말을 마치고 테이블 위의 작은 용기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청양고추 장아찌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걸 한 움큼 집어 들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매운맛을 견디며 독한 술을 그대로 들이켰다. 마치 스스로를 벌주듯이.
배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는 묵직한 시선으로 송유진을 노려봤다.
그녀가 네 번째 술병을 따서 입으로 가져가려던 순간 배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갑자기 발을 뻗어 눈앞의 테이블을 세게 걷어찼다.
“X발. 송유진, 그만해.”
송유진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미 목구멍이 타들어 가고 위는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버텼고 배도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성의가 충분해?”
“꺼져.”
배도현의 목소리가 짙게 깔렸다.
그러나 송유진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태연한 침묵에 더욱 짜증이 난 배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힘껏 던졌다.
쨍그랑.
하지만 송유진이 피하지 않아서 잔이 그녀의 이마에 정확히 부딪혔고 피부가 찢어지자 피가 흘러내렸다.
배도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송유진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모든 시선이 송유진에게로 향했다.
몇몇은 송유진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눈을 돌렸다.
“유진아, 도현이 술 많이 마셔서 그래. 너도 그만...”
누군가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배도현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닥쳐.”
그리고는 다시 송유진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송유진, 이 지긋지긋한 짓 이젠 지겹지 않아?”
송유진은 손을 들어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젠 나랑 끝내겠다는 거야?”
배도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끝내? 우리가 무슨 관계였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송유진은 아무 말 없이 배도현을 가만히 바라봤는데 그의 말이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머리가 어지럽고 몸도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 관계가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송유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어.”
그녀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배도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알겠으면 얼른 꺼져.”
송유진은 말없이 몸을 돌렸고 휘청이며 천천히 룸을 빠져나갔다.
“도현아, 유진이 다쳤잖아. 정말 안 따라가 볼 거야? 혹시 이번엔 진짜 안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누군가 배도현에게 물었다.
“안 가.”
배도현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무심히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한 번에 들이켰다.
룸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그래, 뭐가 아쉽다고 붙잡아? 다들 송유진이 어떤 애인지 알잖아. 두고 봐, 하루 이틀도 못 버티고 다시 기어올 걸?”
“어제만 해도 봐봐. 도현이가 부르니까 호텔까지 직접 콘돔 배달해 주러 갔잖아? 게다가 도현이한테 몸은 괜찮냐고 걱정하기까지 했다니까.”
“도현아, 너 진짜 뭐 했길래 걔를 이렇게 푹 빠지게 만들었냐?”
“야, 인정할게. 도현이 너 진짜 대단해.”
“...”
그런데 이때 구석에서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하준식이 문득 입을 열었다.
“배도현, 이제 질렸으면 나 주라. 송유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 말에 배도현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러자 그의 시선에 하준식은 움찔하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얼른 사과하려는 순간 배도현이 무심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