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최태준은 유아람에게 새우 껍질을 까주었고 유아람은 애교를 부리며 최태준의 품에 파고들어 잘 까놓은 새우를 최태준에게 먹여주었다.
한껏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최태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홍서윤에게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둘의 식사는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
식사가 끝났을 때 홍서윤은 팔이 너무도 저렸던지라 그저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 했다.
유아람은 친근하게 다가와 홍서윤의 손을 잡았지만 웃는 얼굴 뒤로 일부러 홍서윤의 상처를 꾹 눌렀다.
홍서윤은 밀려오는 통증에 놀라 유아람을 밀쳐냈고 유아람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곧이어 코끝이 붉어지고 눈물이 차오르더니 억울한 듯 말했다.
“서윤아, 내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혹시 내가 한 말이 네 기분을 상하게 했던 거야?”
“홍서윤! 정말 실망이야.”
최태준은 바로 유아람을 품에 안은 채 싸늘한 눈빛으로 홍서윤을 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홍서윤을 향한 혐오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가슴속에는 아직도 희망이 작게나마 남아 있었다. 예전처럼 작은 상처 하나에도 최태준은 자신을 안쓰러워할 것이라며 말이다.
홍서윤은 손을 내밀어 더 벌어진 상처를 최태준에게 보여주었다.
“아저씨, 아람 언니가 먼저 제 상처를 꾹 누른 거예요.”
최태준은 고개를 숙여 홍서윤의 상처를 보다가 멈칫했고 미간을 확 구겼다.
유아람은 상황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눈치채고 바로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태준 씨,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요. 먼저 병원에 데려가 주면 안 돼요?”
최태준은 유아람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잠깐이나마 눈에 스쳤던 안쓰러움은 사라지고 차가움만이 남았다.
“네 잔꾀는 집어치워. 유아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말과 함께 최태준은 유아람을 안아 들고 떠났다. 끝까지 홍서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이다.
홍서윤의 가슴은 오래된 통증에 이미 마비되어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처음 최씨 가문에 발을 들이게 된 그 날, 집안의 도우미들은 그녀를 무시하며 일부러 배불리 먹지 못하게 괴롭혔다. 나중에 알게 된 최태준은 그들을 바로 해고했을 뿐 아니라 더는 도우미로 일하지 못하게 해버렸다.
최태준은 늘 홍서윤을 잘 지켜주었고 절대 남에게 괴롭힘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도 했었다. 10년 동안 최태준은 그 약속을 계속 지켜왔다.
하지만 그 약속은 4년 전 그녀가 고백했던 그 날부터 더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날 밤 유아람은 게시글을 올렸다.
사진 속에서 최태준은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며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귀에는 넘치는 행복이 넘어났다.
홍서윤은 그것을 보고도 무덤덤하게 넘겨버렸다.
출국 한 달 전, 홍서윤은 비자 발급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그녀는 아예 밖에 월셋집을 얻었고 최태준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최태준의 집에 있는 물건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돈 주고 산 것만 챙겨 나왔다.
지난 15년 동안 최태준이 자신을 위해 쓴 돈은 모두 하나의 두꺼운 노트에 적어 두었고 언젠간 갚을 생각이었다. 모두 갚고 나면 최태준과 그녀는 완전히 끝날 것이다.
합격 통지서는 최태준의 집으로 배달되었고 마침 최태준이 그것을 받았던지라 홍서윤은 긴장된 마음으로 가지러 왔다.
최태준은 홍서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며 이상하게 여겼지만 따로 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네 전공이 디자인이었지. 아람이가 네가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취직이 힘든 걸 알고 너에게 신혼집 디자인을 맡기고 싶대. 경험도 쌓고 돈도 충분히 줄 거야.”
“필요 없어요.”
홍서윤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한테 돈을 주지 않아도 돼요. 아저씨가 그동안 저를 많이 도와주셨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갚는 거로 할게요.”
너무나 담담한 홍서윤의 모습에 최태준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할 말은 없어?”
홍서윤은 며칠 동안 정성껏 만든 원앙새 소품을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 두 분 행복하세요.”
출국 보름 전 홍서윤은 그들의 신혼집 디자인을 완성했다.
디자인은 전적으로 유아람의 취향에 맞췄던지라 유아람은 크게 만족했다. 홍서윤이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크게 울렸다.
홍서윤의 발은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유아람은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가야 했다. 홍서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분 좋게 여기서 하룻밤 묵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홍서윤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웅크렸다.
이때 문이 열리며 최태준이 들어왔고 침대 위에서 꿈틀대는 걸 발견한 그는 홍서윤을 끌어안고 낮게 속삭였다.
“아람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최태준은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목덜미에 파묻게 했다.
너무나도 다정하고 부드러운 행동에 홍서윤은 모든 걸 잊고 빠져들 뻔했지만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최태준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뜨거운 입맞춤이 불쑥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홍서윤에게 입맞춤했고 어찌나 거칠었던지 홍서윤이 피할 틈도 없이 휘말려 정신이 아득해지며 저항하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저...”
최태준은 한 손으로 홍서윤 옆을 짚은 채 침대 위에 반쯤 무릎 꿇고 있었고 상반신의 매끈한 근육이 은은한 불빛에서 터져 나올 듯한 힘을 감춰주고 있는 것 같았다.
뜨거운 숨결이 홍서윤의 목덜미로 향하는 순간 몸속 깊숙이 파고들어 무언가를 자극했고 곧 터져 나올 듯 꿈틀댔다.
홍서윤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최태준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고 무엇보다 최태준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홍서윤은 가슴이 아려왔고 입을 벌려 최태준의 어깨를 세게 꽉 물어버렸다.
그러자 최태준은 낮게 신음을 냈다.
그 틈을 타 홍서윤은 힘껏 최태준을 밀쳐내고 가차 없이 뺨을 후려쳤다.
찰싹!
맑고 또렷한 뺨 때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렸고 홍서윤은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그의 거친 숨결만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