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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 순간, 거센 돌풍이 몰아치며 바다 위로 거대한 파도가 솟구쳤다. 유람선이 심하게 흔들렸고 심지유의 목소리는 파도와 비명에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 유선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바람이 너무 세서 하나도 안 들렸어.”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심민주가 유선우의 팔을 꼭 붙잡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밖은 너무 위험해. 나 무서워.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곧이어 모두가 그녀를 감싸며 서둘러 안으로 향했고 갑판 위에 심지유만 홀로 남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돌고래 무리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내 운명일지도 몰라. 심씨 가문의 세 형제와 유선우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유가 방금 빈 소원은 그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란 걸. 그들이 한 번도 그녀의 진심을 소중히 여긴 적 없듯, 이제 그녀 역시 그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 며칠 뒤, 심민주는 상류층의 사교무도회 초대장을 받았는데 세 명의 오빠들과 유선우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오빠들은 노바시에 가서 나한테 줄 핑크 다이아몬드를 살 거고, 선우의 회사는 몇십조 규모의 계약 건을 앞두고 있어서 바쁘다고 하네.” 심민주는 초대장을 흔들며 달콤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유야, 나랑 같이 가줄래?”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이런 자리는 5년 만이라 너무 긴장돼.” 심지유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난 안 갈래.” 하지만 곧 네 남자의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민주의 몸 상태가 안 좋아. 네가 같이 가서 좀 챙겨줘.” 심민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명령하듯 말했다. “그런 자리는 네가 제일 익숙하잖아. 민주가 실수하지 않게 잘 보살펴 줘.” 심세훈이 안경을 고쳐 쓰며 덧붙였다. 심재민은 아예 심지유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괜히 문제 만들지 말고 민주 곁을 잘 지켜.” ‘쿵’ 하고 차 문이 닫혔다. 창문 너머로 네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심지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들은 언제나 심민주가 상처받을까만 걱정하고 그녀가 원하는지는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 무도회장에서 심민주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조명 아래서 누구보다 빛났다. “이거 네가 대신 마셔줘.” 그녀는 샴페인 잔을 심지유의 손에 쥐여주며 달콤하게 웃었다. “내가 술에 취해서 돌아가면 오빠들 반응이 어떨 것 같아?” 심지유는 잔을 꽉 쥐어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심민주의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만약 심민주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그 네 사람은 분명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고, 또 비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지유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어머, 술에 취했네?” 심민주는 놀란 척하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내가 방까지 데려다줄게.” 심지유는 밀쳐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거의 끌리다시피 긴 복도를 지나 한 호텔방으로 밀려 들어갔다. “즐거운 밤 보내.” 심민주는 심지유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곧바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심지유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흐릿한 시야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남자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심민주 씨가 돈을 꽤 썼어요. 그쪽을 잘 모시라고 하더군요.” 그는 손을 뻗어 심지유의 치마를 잡아당겨 보았다. “역시 들은 대로 대단하네요.” 심지유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술기운에 힘이 빠져 팔 하나 제대로 들 수 없었다. 남자는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짓눌렀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자 심지유는 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었다. 남자가 그녀의 몸을 짓누를 때 문밖에서 심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여기는 어떻게 왔어? 중요한 계약이 있다더니?” “네가 걱정돼서 왔어.” 유선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는데 여전히 말투가 차분하고 도도했다. “널 데려가려고.” 그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지유는 어디 있어?” “화장실에 갔어.” 심민주는 빈틈없이 뻔뻔하게 말했다. 이때 심지유는 필사적으로 몸을 문 쪽으로 던졌다. “유선우! 나 좀 구해줘!” 그러자 순간 문밖이 조용해졌다. “지유가 화장실에 있는 게 맞아?” 유선우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차가워졌다. “응.” 심민주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안 믿기면 같이 가보자. 곧 나 약 먹을 시간이지만 괜찮아. 기다릴게.” 심지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유선우가 심민주의 말을 믿고 약 먹이러 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숨 막히는 침묵이 한참 흐른 뒤, 다시 문밖에서 유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우선 가서 네 약부터 먹어.” 곧 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심지유는 심장을 도려낸 듯 고통스러워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방 안에서 낯선 남자는 다시 그녀의 옷깃을 잡고 벗기려 했다. 심지유는 절망 속에서 손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침대 머리맡의 크리스털 재떨이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온몸의 힘을 짜내 그 남자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퍽. 남자는 짧은 신음을 남기고 그대로 쓰러졌다. 심지유는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왔다. 길고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언제 하이힐이 벗겨졌는지도 모른 채 차가운 바닥 위를 달리고 또 달렸다.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심지유는 비를 뚫고 도로 위로 뛰어올랐는데 그 순간,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강한 불빛이 다가왔다. 퍽.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몇 미터 떨어진 아스팔트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선우야, 우리 사람을 친 것 같아!” 심민주의 당황한 목소리가 차 안에서 들려왔다. “내려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비가 세게 내리는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유선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아. 비서를 시켜서 처리하면 돼.”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네가 약 먹는 게 중요하지.” 검은 차가 미끄러지듯 다시 달려갔고 튀어 오른 흙탕물과 피가 뒤섞여 심지유의 창백한 얼굴에 묻었다. 그녀는 피웅덩이에 누워 있었고 붉은 피가 계속 내리는 빗물에 씻겨 천천히 도로 옆 배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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