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배유현은 무언가가 밟히는 듯한 느낌에 발을 들었다. 그의 발아래에 있었던 건 등에 꿀벌의 날개가 달린 핑크색 토끼 인형이었다. 이건 성다희가 매우 아꼈던 인형이었다. 배유현이 혼종이라며 못생겼다고 했을 때 성다희는 그를 째려보며 인형을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었다. 놀리는 맛이 있어 배유현은 인형을 볼 때마다 못생겼다고 놀렸고 성다희는 볼이 부루퉁해진 채 나중에는 그의 팔을 퍽퍽 쳐버렸다. 배유현이 못생겼다고 한 인형은 사실 그가 직접 뽑아준 인형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성다희가 인형이 갖고 싶다며 하도 애교를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뽑아줬던 인형이었다. 배유현은 토끼를 손에 든 채 지난날을 떠올리며 성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없는 번호였다. 성다희는 마치 그와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 후로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유현은 더 이상 성다희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나중에야 그녀가 갑자기 휴학계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 다시 학교로 돌아온 후 감정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바로 학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회사 쪽은 어차피 관심도 없었기에 형과 누나에게 맡겼다. 성다희라는 존재는 그날 이후 그렇게 천천히 가시처럼 그의 심장에 뿌리를 내렸고 그 가시는 지금도 가끔 움찔거리며 배유현의 마음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배유현은 가시가 박혀있는 이 느낌이 너무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인정했다. 성다희라는 가시가 심장 어딘가에 박혀있다는 것을. ... 다음 날 오후. 배유현은 늘 그렇듯 다시 출근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인영 하나가 차 앞에 뛰어들었고 깜짝 놀란 그는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량이 멈춰선 후 그는 얼른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앞쪽을 바라보니 웬 여자아이가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채 깜짝 놀란 얼굴로 차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배유현은 일단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엉덩이를 툭툭 털어주었다. 그러고는 이곳저곳 훑어보며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손바닥에 쓰린 상처만 있을 뿐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여자아이는 정신을 차린 후 배유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는 강아지 좀 봐주세요. 하마터면 차에 깔릴 뻔했어요.” 2개월 정도 되는 강아지 한 마리가 아이의 품에 안겨있었다. 배유현은 아이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가늘게 뜬 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나한테 진료받았던 그 애구나.’ 생각보다 빨리 떠올라버린 아이의 얼굴에 배유현 스스로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이름이... 윤아린이었나?’ “강아지보다는 네가 먼저야. 방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 알아? 내가 제때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배유현은 엄한 얼굴로 말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엄마랑 아빠는 어디 있어?” 아이는 갑작스러운 호통에 조금 놀란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아린아!” 그때 등 뒤로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온 여자는 아이를 보자마자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요. 강아지도 무사해요.” 손바닥이 살짝 따끔하기는 했지만 아이는 괜찮다며 윤채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말 괜찮아요. 숨 쉬어요, 엄마.” 윤채원은 오늘 토요일이라 딸과 함께 햄버거를 먹으러 나왔다. 그런데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밖으로 나와보니 마침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려왔고 희미하게 보이는 차 앞 아이의 인영에 그녀는 심장이 다 멈추는 줄 알았다. 다행히 딸은 무사했고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윤채원은 고개를 들었다가 배유현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배유현은 회색 운동복 셋업을 입고 있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눈썹을 살짝 끌어올린 모습이 꼭 운동복 모델 같았다. 윤채원은 배유현과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친 후 아이를 천천히 자신의 뒤쪽으로 보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입술은 바싹 말라왔다. “어... 저기...” 윤채원은 오늘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채원은 배유현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어지럽기도 하고 귀에서는 윙윙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타요. 병원으로 가서 정말 괜찮은지 확실히 검사를 해보죠.” 배유현은 아이를 뒤로 보내는 윤채원의 행동에 꼭 자신이 악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윤채원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유현은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오르더니 경적을 한번 울리며 윤채원을 향해 외쳤다. “아이들은 몸이 약해서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러니까 빨리 타요. 어차피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으니까.” 그는 말을 마친 후 윤채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흰 피부가 강렬한 햇빛 때문에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배유현은 지나치게 흰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왠지 모르게 조금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것도 자꾸 눈에 밟혔다. ‘아무리 봐도 애 엄마 같지 않단 말이야. 그리고...’ 배유현은 그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다. 구닥다리 작업 멘트 같아 보일 테니까. 배유현은 두 손을 운전대에 올려놓은 채 계속해서 윤채원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여자였다. 보통은 아이가 차에 치일 뻔했으면 아무런 외상도 없어 보여도 일단 병원으로 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사하게 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윤채원은 배유현의 말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딸을 데리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배유현은 두 사람을 데리고 CT를 찍으러 왔다. 환자가 아이일 경우 보호자가 꼭 곁에 있어야 했기에 그는 윤아린을 안아 든 채 성큼성큼 검사실 안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동료 의사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배 선생 딸이야? 둘이 똑 닮았네.” 윤채원은 그 말에 웃을 수 없었다. 무거운 돌덩어리가 심장에 쿵 하고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쏠린 사람들의 시선도 매우 불편했다. 배유현은 동료 의사의 말에 피식 웃어주고는 고개를 돌려 윤채원을 바라보았다. “검사실 안은 내가 들어갈 테니까 검사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 네.” 윤채원은 그렇게 답한 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지 않게 계속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배유현이라는 남자는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남자라 주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여자가 배 선생님 여자 친구예요?” “배 선생이 저런 스타일을 좋아했었네.” “지난번에 수빈 씨를 거절했을 때는 가슴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다리도 길고 늘씬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던데요?” “배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군요. 어쩐지 저한테는 관심이 전혀 없더라니...”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그보다 수빈 씨는 지금 어때? 병원장인 아빠의 권력까지 이용해 배 선생을 손에 넣겠다고 흉부외과까지 왔는데 대차게 거절당했잖아.” “난리 났죠 뭐. 부잣집 아가씨가 언제 거절이라는 걸 당해봤겠어요. 그보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굴까요? 정말 배 선생님 애인일까요? 그럼 혹시 방금 선생님이랑 같이 검사실로 들어간 그 애는 배 선생님 딸...?”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딱 봐도 배 선생네 친척이나 친구네 집 애구만.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배 선생한테 저렇게 큰 애가 있을 리가 없잖아.” “하긴 그렇긴 해요. 그런데 저 여자 너무 예쁘지 않아요? 꼭 사극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 같아요.” 간호사들의 잡담은 배유현이 검사실에서 다시 나오고 나서야 멈췄다. 윤아린은 온 오후 검사만 했다. 손목 인대가 살짝 늘어나고 손바닥에 가벼운 찰과상이 있는 것 외에는 다행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윤채원은 결과를 받은 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배유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선생님 덕분에 안심할 수 있게 됐어요.” “혹시라도 아이한테 후유증이 생기거나 하면 여기 적혀있는 연락처로 연락 줘요.” 배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윤채원은 명함을 건네받은 후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윤아린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배유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윤채원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린 후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린이 심장 문제 때문에 선생님께 진료받은 적이 있어요. 하루에 몇십 명도 더 되는 환자를 보실 테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배유현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렸다. 그가 물은 건 진료실에서 봤던 그때가 아니었다. “제가 그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지는 않습니다, 아린이 어머니.” 윤채원은 심연처럼 깊은 배유현의 눈동자와 마주하고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