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던 어느 날.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은 몸을 한 여자가 병원 앞에 서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깡마른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임신 검사 결과지였다.
검사지에 적힌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에 그녀의 어머니인 최익순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모진 말을 쏟아냈다.
“또 아니야? 너는 어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니? 너 이대로 계속 아이 못 가지면 그때는 너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힘들어져!”
채시아는 공허한 눈으로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결국에는 이 한마디밖에 꺼내지 못했다.
“...미안해.”
“시아야, 엄마는 미안하다는 소리 말고 네가 윤성빈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 내가 뭐 큰 걸 바라니? 임신만 하면 된다잖아. 그게 어려워?”
채시아는 목이 메어와 고개를 점점 더 아래로 떨궜다.
결혼 생활 3년 동안 남편이 한번도 곁을 내어준 적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최익순은 자신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더니 이내 차가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 안 되면 성빈이한테 괜찮은 여자나 한 명 소개해줘. 그러면 적어도 너한테 고마워는 할 거 아니야.”
채시아는 이 말만 남긴 채 매정하게 떠나버린 어머니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자신의 편이어야 할 존재가 남편에게 새 여자를 소개해주라고 한다.
이만큼 가슴 시린 일이 또 있을까?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채시아의 머릿속은 아직도 최익순이 떠나기 전에 남긴 그 한마디로 꽉 차 있었다.
그때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차례 굉음이 들렸고 그녀는 귀를 매만지며 자신의 병이 한층 더 심해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띠링.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보낸 사람은 윤성빈으로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안 들어가.]
윤성빈은 지난 3년간 한번도 집에 와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채시아는 신혼 첫날밤에 그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감히 사기 결혼을 해? 나를 상대로? 어디 평생 혼자 외롭게 늙어봐!”
평생 혼자 외롭게 늙어보라는 말은 마치 저주처럼 그녀의 가슴에 콱 박혔다.
3년 전, 채씨 가문과 윤씨 가문은 정략결혼을 맺었다.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양가의 이익이 보장된 그저 하나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채씨 가문에서 돌연 마음을 바꾸며 윤성빈이 채시아에게 예물로 줬던 몇천억 원의 돈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전부 다 빼돌려버렸다.
윤성빈이 사기 결혼이라고 한 건 다 그것 때문이었다.
채시아는 당시의 생각에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힘없이 손을 움직이며 여느 때와 같이 [네]라는 한 글자를 보냈다.
집에 도착한 채시아는 오는 길 내내 손에 꽉 말아 쥐고 있던 검사 결과지를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매달 이맘때쯤이면 그녀는 유독 더 피곤해했다.
다행히 오늘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할 필요가 없어 채시아는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채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귓가에서 또다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또한 윤성빈이 채시아를 싫어하는 점 중의 하나였다.
난청.
재벌가에서 난청은 아주 큰 장애였다.
그러니 윤성빈이 그녀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새벽 5시.
이제 1시간만 더 지나면 윤성빈이 돌아오게 된다.
채시아는 비몽사몽 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서야 자신이 그만 소파에서 잠들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윤성빈은 시간에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전에 급한 일 때문에 아침밥을 제때 차려주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윤성빈은 한 달 가까이 그녀에게 문자는 물론이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6시.
현관문이 열리고 정장 셋업을 입은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란 기럭지에 잘생기고 남자다운 얼굴, 자연스럽게 거실을 활보하는 그는 다름 아닌 채시아의 남편인 윤성빈이었다.
채시아는 그의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남편인 그가 매우 멀고 차갑게 느껴졌다.
윤성빈은 채시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앞으로는 아침밥 준비 안 해도 돼.”
채시아는 그 말에 흠칫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저도 모르게 비굴하고도 멍청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윤성빈은 고개를 들어 3년 내내 똑같이 무기력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내지 도우미가 아니야.”
채시아는 결혼한 3년 내내 늘 똑같은 연한 회색 계열의 옷만 입었고 답장도 늘 [네]가 다였다.
솔직히 정략결혼만 아니었으면, 채씨 가문의 사기 결혼만 아니었으면 그는 이런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지도 않았다.
윤성빈의 눈에 채시아는 자신의 아내라면 달해야 하는 수준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그런 여자였다.
‘내가 원하는 건 아내지 도우미가 아니야.’
채시아의 귓가에 또다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또다시 윤성빈이 싫어하는 그 말을 내뱉었다.
“네.”
윤성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져 수저를 내려놓았다. 평소 제일 좋아하던 아침밥을 눈앞에 두고도 좀처럼 식욕이 돌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나가려는 듯 외투를 챙겼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채시아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빈 씨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윤성빈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무슨 뜻이야?”
채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윤성빈은 단지 그녀와 3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남편이 아니었다. 윤성빈은 그녀가 12년이나 좋아했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채시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그녀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나는 괜찮으니까 그 사람이랑...”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성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라버렸다.
“하! 이제는 하다 하다.”
...
인생이라는 건 원래 비우기의 연속이다.
윤성빈이 떠난 후 채시아는 홀로 처량하게 베란다에 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채시아도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윤성빈을 12년이나 사랑했는데도 여전히 그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선명하게 들렸다가 또 모호하게 들리는 빗소리를 즐기며 한 달 전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채시아 씨의 청력이 감퇴하고 있는 건 청신경과 각 중추신경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치료할 방법은 있나요?”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장시간의 신경성 청력 저하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치료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보청기를 계속해서 착용하시고 청각 재활 훈련도 꾸준히 받으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채시아는 눈을 감으며 보청기를 뺐다.
소리가 들려오는 입구를 없애버리니 세상이 다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정적이 영 적응이 안 되는지 채시아는 금세 다시 거실로 와 티비를 켰다.
볼륨을 최대로 높여보니 미약하게나마 소리가 조금은 들려왔다.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는 마침 세계적인 발라드 퀸인 임수아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채시아는 임수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움찔 떨었다.
임수아가 윤성빈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임수아는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카메라에 담긴 그녀는 더 이상 채씨 가문의 후원을 간절히 바라던 자존감 낮고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예전의 임수아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수많은 기자들을 앞에 두고도 여유를 잃지 않는 자존감으로 꽉 들어찬 당찬 여성이었다.
“제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건 제 첫사랑 때문이에요.”
채시아의 손에 들려있던 리모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마음도 함께 철렁하며 내려앉았다.
밖에서는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임수아의 말에 채시아가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임수아가 윤성빈을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녀는 채씨 가문의 사랑받는 딸이면서 배경도 뭣도 없는 임수아를 두려워했었다. 임수아 앞에만 서면 자꾸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상대가 다시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성공한 발라드 퀸이 되어서 말이다.
채시아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티비를 끄고는 설거지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엌에 도착한 그녀는 식탁 위의 접시들을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제야 윤성빈이 깜빡하고 휴대폰을 두고 간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자 화면이 자연스럽게 켜졌고 마침 몇 분 전에 도착해있던 문자 내용도 함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