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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채시아는 방으로 돌아온 후 바로 약을 한가득 입에 털어 넣었다. 귀를 만져보니 축축한 것이 또 피가 나고 있었다. 순간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채시아 씨, 사실 병세가 악화하는 이유 중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환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주세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니, 말이 쉽지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채시아는 최대한 윤성빈의 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동이 막 트려고 할 때까지도 그녀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시 후, 약효가 들기 시작했는지 청력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채시아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비가 그쳤네.” 사람은 생각보다 단단해서 말 한마디 두 마디로 무너지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 괴로움과 상처가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을 때야 비로소 사람은 무너지게 된다. 그제야 사람은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포기하게 된다. 오늘 윤성빈은 외출하지 않았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채시아가 사과하고 후회하기를 기다렸다. 지난 3년간, 채시아도 종종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결국에는 매번 그녀가 먼저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윤성빈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채시아가 평소처럼 옅은 회색 계열의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의 손에 캐리어 하나와 종이 쪼가리 하나가 들려있다는 것이었다. 윤성빈은 채시아의 손에 들려있던 그 종이 쪼가리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게 이혼합의서라는 것을 알아챘다. “시간 될 때 전화 줘요.” 채시아는 평온한 얼굴로 이 한마디를 건네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채시아는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 윤성빈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쥔 채 망부석처럼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채시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가 가버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슴이 답답했던 것도 잠시 그는 금세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윤성빈은 채시아가 떠난 걸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면 채시아는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심지어 전보다 훨씬 사근사근한 태도로 그를 대할 테니까. 이번에도 분명히 전과 똑같은 레퍼토리일 게 분명했다. 오늘은 추석 이후의 주말이라 윤성빈은 본가로 향했다. 매년 이때쯤이면 윤성빈은 늘 채시아와 함께 윤 씨네 본가로 가 제사를 지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채시아를 데리고 가면 항상 친척들의 눈빛 때문에 피곤했는데 올해는 혼자라 그런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윤성빈은 기분이 좋은지 운전하면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윤씨 일가는 대가족이라 방계 친척까지 하면 거의 500명 정도는 되었다. 그중 윤성빈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만 해도 벌써 7, 80명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많은 젊은이들 중에서도 윤성빈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선명 그룹의 대표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윤성빈의 친척들은 남녀노소 구분할 거 없이 모두 그를 동경하고 또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들끼리 쉬쉬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윤성빈이 사기 결혼을 당한 것뿐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자가 있는 여자를 아내로 삼게 됐으니까. 윤씨 본가. 김예화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도우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이따 채시아가 오면 절대 거실로 들이지 마세요.” 제사 때 장손 며느리도 꼭 참석해야 하는 가문의 규정이 없었으면 아마 김예화는 채시아를 부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채시아가 이번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연이어 도착한 친척들은 윤성빈의 아내가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더니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늘 제일 먼저 도착해 친척들을 살뜰히 챙기던 그녀였으니까. 김예화는 친척들과 담소를 나누다 채시아가 아직도 안 왔다는 얘기를 듣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제사는 오기 싫다고 마음대로 안 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김예화는 윤성빈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성빈아, 시아는?” 한창 또래 친척들과 얘기를 나누던 윤성빈은 시아라는 말에 바로 얼굴을 굳혔다. “이혼하겠다고 집을 나갔어요.” 그의 말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며 하나같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예화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윤성빈의 부모 다음으로 윤성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채시아였으니까. 채시아는 7년 전에 윤성빈이 하마터면 칼에 찔릴 뻔했을 때도 몸을 던져 구해줬고 4년 전에 약혼하고 나서 얼마 안 돼 윤성빈이 해외로 갔다가 사고가 생겨 다들 윤성빈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했을 때도 그녀만큼은 그럴 리 없다며 두말없이 그를 찾으러 갔다. 낯선 도시에서 3일을 꼬박 새우며 드디어 윤성빈을 찾았을 때 윤성빈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며 그녀에게 면박을 주었다. 채시아의 사랑은 결혼하고도 식는 법이 없었다. 윤성빈이 아플 때면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고 늘 건강한 음식들로만 끼니를 챙겨주었으면 윤성빈의 주변인들을 대할 때는 그게 임시로 며칠 동안만 근무한 비서일지라도 예의 바르게 대하며 책잡힐 일 없게 했다. 그랬던 그녀가, 윤성빈이라면 지옥 끝까지도 찾아올 것 같은 그녀가 윤성빈에게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집까지 나갔다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김예화는 채시아가 왜 이제 와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뭐가 됐든 지금이라도 자기 아들을 놔줘서 다행이었다. “애초에 성빈이 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애였어. 차라리 잘 됐어. 이혼해. 엄마는 찬성이야.” 김예화가 먼저 입을 열자 벙쪄 있던 친척들도 너도나도 한마디 얹었다. “그래. 형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여자를 만나. 3년도 오래 산 거야.” “나는 걔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부잣집 딸내미가 품위도 없이 굽신거리기나 하고.” “내 말이요. 이제라도 주제 파악을 해서 다행이에요.” “...” 분위기는 한순간에 누가 누가 채시아를 더 잘 비난하고 조롱하느냐로 바뀌었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채시아는 만물의 악이었다. 채건우가 살아있을 당시 부잣집 도련님들이 허구한 날 채시아에게 결혼하자며 프러포즈했던 건 다들 이미 다 잊은 듯했다. 또한 윤성빈과 채시아의 정략결혼을 먼저 제안한 게 윤씨 가문이었다는 것도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친척들은 전까지는 윤성빈 때문에 눈치가 보여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렸다가 이혼 얘기가 나오자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쉴 틈 없이 입을 털어댔다. 윤성빈은 친척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속이 시원하고 기뻐야 하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의 말이 무척이나 거슬리게 들려왔다. 제사가 끝난 후, 윤성빈은 아침 일찍 본가를 떠났다. 그가 청림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윤성빈은 습관적으로 외투를 현관에 던져두었다. 지금쯤이면 누군가가 벌써 달려와 그의 외투를 받아들었을 텐데 아무리 기다려 봐도 그 누군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윤성빈은 고개를 들어 시꺼먼 거실을 쳐다보다 그제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인지했다. 그는 혀를 한번 차더니 이내 벗어둔 외투를 다시 집어 들고는 안쪽으로 걸어가 신경질적으로 외투를 세탁기 안에 던졌다. 오늘따라 그는 유독 더 피곤해 보였다. 윤성빈은 다시 거실로 나와 채시아가 떠난 것을 축하할 겸 술을 마시기 위해 와인 셀러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문이 잠겨있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집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싫어해 전부터 별장에는 파트 타임 도우미밖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채시아와 결혼한 뒤로는 파트 타임 도우미도 전부 없애고 그녀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래서 와인 셀러의 열쇠도 분명히 채시아에게 있었다. 윤성빈은 그 생각에 침실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짜증스럽게 서랍을 닫더니 열쇠 찾는 것을 포기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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