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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유진서가 말했다. “순위가 궁금한 학생들은 휴대폰으로 나한테 물어보면 돼.”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추다희에게 순위를 보냈다. 옆에서 누군가 추다희의 순위를 보려고 다가가자 추다희는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보여줬다. “와, 역시 1등이었어... 대단하다, 너.” “그럼 이번에 다희가 대회 나가는 거야?” 추다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속으로 몰래 흥분하던 그때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중간고사 성적만 보는 것도 아니잖아. 허이설이 시험 도중에 나간 거 아니야? 그래도 수석으로 입학했으니까 교수님들이 투표로 뽑으면 결국에는 이설이가 가게 될 거야. 게다가 제하도 나가는데 이설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있겠어?” 추다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정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눈엔 이미 내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이설도 중간고사 도중에 나갔던 기억이 났다. 그건 용제하 때문이었다. 그날 시험에 용제하가 오지 않아 허이설이 문상준에게 물었더니 집에 일이 생겼는지 용제하가 전화 한 통 받고 급히 떠났다고 했다. 허이설과 용제하가 결혼하면서 다들 허이설이 용씨 가문에 시집가 사모님으로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했다. 하지만 허이설은 용제하의 가족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부모를 만나자고 했을 때 용제하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의 결혼식엔 용제하의 친구들, 사업 파트너, 그리고 허이설의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했다. 허이설은 이제 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 가족한테 소개하지 않은 이유가 내가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었던 아내가 아니어서? 만약 다희랑 결혼했다면 모든 게 달랐을까?’ 결국 허이설은 참지 못하고 시험 중간에 뛰쳐나와 용제하를 찾아갔다. 용제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도 하도 많이 보내서 무슨 말을 보냈는지조차 잊었다. 기억나는 건 용제하의 답장뿐이었다. 술집 이름을 알게 된 허이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갔다. 술집에 도착했을 때 조명이 어두워 용제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술에 취했는지 팔꿈치를 베고 엎드려 있었다. 허이설이 다가가자 용제하는 긴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처음으로 용제하와 그렇게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진한 담배 냄새가 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허이설은 가만히 서서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목덜미 쪽에 닿았을 때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손이 따끔거렸다. 용제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긴 손으로 허이설의 손목을 잡고 품에 끌어당겼다. 곧은 콧날이 그녀를 스쳤다. 몸에서 풍기는 진한 술 냄새가 은은한 우드 향을 덮어버렸다. 허이설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한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당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것만 기억났다. 허이설이 끈질기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용제하의 갈색 눈동자가 안개에 덮인 듯했다.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잠시 맑아진 듯했지만 여전히 취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낮게 물었다. “뭐 좋아해?” 허이설은 화제가 왜 이쪽으로 튀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용제하가 그녀를 깨물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중얼거리긴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누구 이름을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용제하가 고개를 허이설의 어깨에 묻은 그때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그는 뜨거운 손으로 허이설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지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또 말했다. “집, 차, 다이아몬드, 가방...” 용제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다 줄 수 있어...” 인사불성인 사람이 한 얘기라 허이설은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난 고양이 좋아해.” 그녀는 아무렇게나 답했다. 용제하는 사람을 거부하는 오만하고 도도한 고양이 같았다. 그녀에게 기대 잠이 든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허이설이 일으키려 하자 커다란 몸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더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왜냐고, 고양이는 쓸모없고 값도 안 나간다고 했다. 허이설이 대충 답했다. “그냥 좋아해.” 그 고양이가 그녀를 무시해도 그래도 좋아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꼬리가 있어 꼬리로 감정을 드러내지만 용제하에게는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용제하가 비싼 고양이를 사주겠다고 했으나 허이설은 진심으로 듣지 않았다. 다행히 그러길 잘했다. 그는 그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 날 만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허이설.” 귓가에 들려온 부름에 허이설은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추다희가 앞에 서 있었다. 반 회의가 끝났고 교실에 몇 명만 남아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허이설과 추다희에게 향했다. 그 시선 속에서 추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설아, 이번 대회 제하랑 같이 나갈 거야?” 허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추다희의 흰 원피스를 본 순간 용제하가 적었던 메모가 떠올랐다. [오늘 흰 원피스를 입었는데 고양이 밥 주다 더럽혀져서 불같이 화를 냈다.] 추다희와 용제하가 고등학교 동창이라 등하교 중 마주치는 건 정상이었다. 그때 허이설은 용제하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허이설이 말했다. “교수님이 공정하게 뽑는다고 했어. 네 거라면 네가 뽑히겠지.” 허이설도 이번에 추다희가 참가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참가 기회를 포기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용제하가 그녀를 더 아프게 했으니까.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윤가을과 함께 나갔다. 한 남학생이 추다희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추다희가 쳐다보자 그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전에 허이설과 밥을 먹을 때도 몇 번이나 나서서 그녀를 두둔해준 남학생이었다. “이설이가 나가겠다고 한다면 나한테는 기회가 없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속상함이 묻어있었다. “교수님이 공정 경쟁이라고 했잖아. 너한테도 충분히 기회 있어. 너 얼마나 뛰어난데.” “그게 아니라 휴일 때 이설 아빠 차가 리버사이드 팰리스 앞에 세워져 있는 걸 봤어. 거기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난 이설이랑 경쟁 자체가 안 된다는 거 알아. 그래서 별로 속상하지 않아.” 추다희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위로해줘서 고마워.” 그녀를 위로하던 권민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네 말은 이설이가 백으로 뽑혔다는 거야? 제하를 쫓겠다고 이런 대회까지 장난으로 여긴다는 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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