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용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둔 다음 몸을 뒤로 살짝 기댔다.
추다희가 화제를 돌렸다.
“왜 그래? 이 식당 음식 맛이 예전이랑 좀 달라졌어?”
용제하의 시선이 허이설 쪽을 힐끗 스쳤다.
“까먹었어.”
툭 던지듯 네 글자를 내뱉고는 더 이상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제하가 좋은 거 많이 먹어서 질린 거겠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허이설에게 쏠렸다. 하경대학교 게시판에 이런 글이 떠돌았다. 용제하가 허이설 같은 미인도 거절하는 이유를 나열한 글이었는데 그중 가장 화제가 됐던 게 바로 좋은 걸 너무 많이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그저 그렇다는 내용이었다.
방금 담임 교수와 통화를 마친 허이설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제하 대체 얼마나 괜찮은 여자를 만났길래 퀸카까지 거절한대?”
허이설은 앞부분을 듣지 못했지만 그 말이 자신을 비꼬는 거라는 건 알아들었다.
말을 꺼낸 건 아까 추다희를 두둔했던 그 남학생이었다.
윤가을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 좀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추다희가 나섰다.
“가을아, 화내지 마. 그냥 농담한 거야.”
“농담? 농담이면 웃어야지. 여기 웃은 사람 있어?”
윤가을이 테이블을 둘러봤다.
“이설이도 안 웃었고 제하도 안 웃었어. 대체 누구한테 농담했다는 거야?”
허이설도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나도 이런 농담 좋아하지 않아.”
윤가을이 다시 추다희를 쏘아봤다.
“밥 먹자고 우리를 끌고 온 건 너야. 저 학생이 우릴 비꼬는데도 가만히 구경만 하면 어떡해? 이설아, 가자.”
이깟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었다.
윤가을이 허이설을 끌고 밖으로 나가자 허이설도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섰다.
테이블에 두 자리가 비었다. 아까 그 남학생이 더욱 듣기 거북한 소리를 했다.
“허이설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 내가 틀린 말 했어? 쟤가 자존심도 버리고 제하를 쫓아다녔다는 걸 여기 모르는 사람이 있어? 운동장에서 전과 운운한 것도 그냥 밀당하려는 수작인 게 틀림없어.”
추다희는 주먹을 꽉 쥐고 용제하를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시선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긴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눈빛이 살짝 드러났다.
화면이 켜져 있던 휴대폰이 추다희가 쳐다본 순간 꺼졌다. 넓은 어깨를 의자에 기댄 채 천천히 손을 들어 기다란 손가락으로 포크를 쥐었다. 포크 끝에 찍힌 리치를 입술에 대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용제하는 허이설에 대해 어떤 말들이 오가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허이설이 매달리는 꼴을 보면 제하가 가지고 놀겠다고 해도 거절하지 않을걸?”
추다희가 먼저 그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그녀는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용제하가 저 말에 혹시라도 넘어갈까 두려웠다.
용제하가 피식 웃었다.
“글쎄. 재미없어.”
추다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넌 어떤 스타일 좋아해?”
용제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나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맞혀봐.”
윤가을은 허이설과 함께 식당을 나온 후 한시도 쉬지 않고 욕했다. 허이설은 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고백에 성공했던 날은 대학원 진학 통지를 받은 날이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여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대학원 진학 소식을 들은 후 허이설은 넌지시 알아본 적이 있었다. 용제하는 대학원에 가지 않고 졸업 후 바로 사업에 뛰어들 계획이라고 했다.
허이설은 깨달았다. 만약 그녀가 대학원을 선택한다면 용제하와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질 거라는 것을.
고백할 때 허이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예쁘게 꾸미느라 애쓰지 않았고 머리는 대충 묶었으며 화장기 없는 얼굴에 평범한 옷을 입었다. 책 한 무더기를 안고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용제하를 찾아갔다.
다짜고짜 용제하에게 다가가 사귈 거냐고 물었다. 허이설은 고개를 들 용기가 없어 계속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의 검은 티셔츠, 테니스 라켓을 쥔 손, 방금 운동을 마친 터라 불끈 솟은 팔 근육만 보였다.
허이설의 시선이 그의 팔로 향했다가 맨 마지막에 손목시계에 머물렀다. 시간이 1분 1초 흘렀다.
머리 위로 용제하의 건들건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이설, 고백 점점 대충 한다?”
허이설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그땐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는데 용제하가 진짜로 받아줄 줄은 몰랐다.
허이설은 믿을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심지어 그녀를 여자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군고구마 먹고 싶어.”
윤가을의 목소리가 허이설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허이설이 고개를 돌려보니 고구마 장수 아저씨가 있었다. 그녀도 아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두 사람은 커다란 군고구마 하나를 사서 나눠 먹었다.
허이설이 숟가락 위의 고구마를 보며 물었다.
“가을아, 오늘 그 여학생이 용제하한테 연락처 물어보는 거 보고 무슨 생각 했어?”
윤가을은 잠시 멈칫했다.
“네가 속상해할까 봐 내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본 거야.”
허이설이 말했다.
“난 그 여학생이 한 번 만난 사람을 몇 년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했어.”
그녀처럼 말이다.
“쯧쯧쯧. 그러니까 절대 용제하랑 사귀면 안 돼.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라서 결혼해도 여자들이 계속 매달릴 거야. 그럼 얼마나 불안해.”
허이설은 속으로 윤가을의 예리함에 감탄했다. 결혼 후에도 용제하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많았다.
대학교에선 그래도 다들 순수해서 그의 얼굴과 지식만 봤고 그런 특별한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엔 달랐다. 용제하의 주변에는 전부 사회에서 잔뼈 굵은 사람들이었다. 재벌 출신에 성공한 사업가인 용제하는 회사 회식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격이 달랐다. 잘생기고 키 크고 게다가 회사의 대표였다. 이때 매달리는 여자는 대부분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노렸다.
하여 늘 불안했던 허이설은 용제하에게 하루에도 수많은 문자를 보냈다.
“가을아, 네 말 들을게.”
허이설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오늘 담임 교수님이 전화 와서 신청서 봤다고 하더라고. 부모님 사인만 받으면 끝이야. 그다음엔 기말고사 준비만 하면 돼.”
기말고사가 아직 두 달 남았다. 허이설이 졸업한 지 2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이번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있었다.
윤가을도 허이설이 해낼 거라 믿었다. 두 사람은 군고구마를 다 먹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허이설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책상에 놓인 자료집을 집어 들고 의자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윤가을은 옆에서 드라마를 보며 틈틈이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았다.
허이설이 책 한 페이지를 넘긴 그때 윤가을이 의자를 끌며 다가왔다.
“통금 시간이 다 됐는데도 다희랑 제하 아직 밖에서 놀고 있어.”
윤가을이 추다희의 SNS 게시물을 허이설에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