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연정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받았을 때, 지수현은 허정운을 위한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지수현은 무방비 상태에서 진한 스킨십을 주고받는 누군가의 사진을 열 장도 넘게 받았다. 사진을 확인한 지수현은 멈칫하더니 안색마저 창백해졌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허정운과 지수현의 쌍둥이 동생 지연정이었다. 두 사람은 껴안고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마다 공통점이 있었다. 지연정을 바라보는 허정운의 시선에는 지연정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허정운의 옆에서 묵묵히 3년을 함께 했지만 지수현은 그런 눈빛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아?” 지수현은 지끈지끈 아파지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사진 속의 배경은 어딘가 익숙했다. 지수현이 답을 떠올리기도 전에 지연정의 메시지가 전송됐다. “언니, 여긴 언니네 신혼집이잖아. 못 알아보겠어? 참, 깜빡했네. 신혼 첫날 밤 말고는 정운 오빠가 언니를 여기에 다시 들인 적 없지? 왜 그런 줄 알아? 이 집은 정운 오빠가 나를 위해서 준비한 거거든. 결혼 날 할머니가 마음대로 그러시지만 않았어도 언니는 아마 평생 여길 들어와 보지도 못했을 거야!” 지연정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가시가 되어 지수현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지수현은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휴대폰을 움켜쥐고 천천히 한 글자씩 입력했다. “지연정, 연정아, 나한테 이런 사진 다시는 보내지 마. 너랑 허정운은 이미 끝난 사이야.” “풉, 정말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해? 나 귀국한 지 2개월 됐어. 지난 2개월 동안 정운 오빠 집에 안 들어갔지? 집에 갈 시간이 없었거든. 매일 퇴근하면 나랑 이 신혼집에서 만났어. 오빠가 나랑 잘 때 언니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는지 알아? 너무 재미없대. 언니는 리얼돌이랑 다를 바가 없대. 언니, 여자로서 너무 실패한 삶 아니야? 내가 언니였으면 진작에 머리 박고 죽었을 거야! 정운 오빠가 그나마 아직 옛정이 남아있을 때 알아서 좀 빠져줘. 아니면 우스워지는 건 언니뿐이야!” …… 지수현은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 쯤에야 지수현은 정신이 돌아왔다. 허정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현관 바닥에 앉아있는 지수현을 발견했다. 허정운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여기 주저앉아서 뭐 해?” 지수현은 고개를 들고 허정운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지수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전히 지수현을 설레게 하는 얼굴이었다. 지수현은 허정운의 눈빛에서 실낱같은 사랑의 감정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귀찮음과 불쾌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3년간 허정운은 줄곧 이런 눈빛으로 지수현을 바라봤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를 바라볼 때 허정운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알게 된 순간, 지수현은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그 고통은 참기 어려웠다. 지수현은 천천히 일어나 허정운을 노려보았다. “지연정이 귀국한 거, 왜 나한테 숨겼어?” 허정운은 멈칫했지만 이내 덤덤하게 말했다. “연정이랑 사이 안 좋잖아. 얘기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지수현은 웃었다. 과연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까? 지연정이랑 불륜한 사실을 들킬까 봐 겁나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지수현은 눈을 감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허정운, 나를 정말 와이프라고 생각했다면 우리의 신혼집에서 지연정과 붙어먹는 일은 하지 못했을 거야!” 허정운의 표정은 한순간 굳어버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고? 지연정한테 가서 물어봐! 나도 내연녀 따위가 무슨 염치로 그런 사진을 나한테 보내서 날 역겹게 만드는지 궁금하거든!” “지수현!” 허정운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차가운 시선은 칼날처럼 지수현에게 아프게 꽂혔다. 허정운은 지연정이 생각도 단순해서 남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지수현을 도발하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네가 생각하는만큼 나랑 연정이 떳떳하지 못한 사이 아니야. 그리고 연정이는 잠시 그 집에서 지내는 것뿐이야. 그리고 연정이가 너한테 그런 사진을 보냈을 리가 없잖아!” 지수현은 허정운의 눈빛에 마음을 칼에 베이는 듯 아팠다. 그녀는 눈물이 차올랐다. “잠시 지낸다고? 내가 바보인 줄 알아?그리고 지연정이 내게 사진을 보냈을 리가 없다니? 내가 걔를 모함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는 줄곧 연정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전에도 너는 이런 일을 꾸민 적 있었잖아.” 지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스스로가 우스워진 기분이 들었다. 허정운이 사건의 자초지종도 자세히 묻지 않고 반사적으로 지연정의 편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지연정이 당당하게 나한테 그런 사진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지연정은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허정운이 자기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수현은 피곤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덤덤히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네가 모함한 거라면 그런 거겠지 뭐.” 허정운의 눈빛에는 분노가 비쳤다.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정이는 너한테 잘못한 거 없어. 앞으로 너한테서 이런 얘기 들을 일 없었으면 좋겠다.” 지수현은 지연정을 괴롭힌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허정운은 지연정을 감싸고 돌았다. 만약 지수현이 정말로 지연정을 괴롭혔더라면 허정운은 지수현을 가만 두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수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정운, 결혼 생활 3년 동안 나를 좋아했던 적 있기나 해? 조금이라도?” 허정운은 냉랭한 시선으로 지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랑 결혼했으니 평생 책임져야지.” 허정운은 대답을 회피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지수현은 피식 웃었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지수현은 고개를 돌린 채 체념한 듯 말했다. “우리 이혼하자.” 지수현은 3년을 버텼다. 언젠간 허정운이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고 사랑해 줄 줄 알았지만 그것은 자기최면에 불과했다. 지수현도 이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정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아했다. “지수현, 억지 좀 부리지 마!” 지수현은 자기의 행동이 허정운의 눈엔 억지 부리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허정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투정 부리는 거 아니야. 합의이혼서는 변호사를 통해서 작성할 거야. 너의 모든 재산은 한 푼도 싫어!” 허정운과 결혼할 때, 지수현은 맨몸으로 결혼했다. 이혼을 앞두고 굳이 허정운의 재산을 탐낸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허정운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수현, 나 바쁜 사람이야. 너랑 싸울 시간 없어. 이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네가 차분해지면 다시 얘기하자.” 말을 마친 허정운은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다툼이 생기면 예전부터 허정운은 늘 이런 식으로 대화를 단절하는 편이었다. 지수현이 먼저 잘못했다고 꼬리를 내릴 때까지 말이다. 그만하려고 마음먹으니 지수현은 그제야 지난 시간 동안 자기가 얼마나 비굴했는지 깨달았다. 허정운이 달래줄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굴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지난날의 지수현은 인젠 없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지수현은 변호사에게 찾아가 합의이혼서를 작성했다. 작성된 서류를 프린트할 때, 변호사는 지수현을 설득했다. “사모님, 한샘 그룹의 시장 가치는 지금 20조 원이 넘습니다. 허 대표님과 3년을 함께 한데다가 마음고생하면서 결혼 사실도 숨겼잖습니까? 허 대표님한테 100억 정도는 요구해도 전혀 무리 없을 겁니다.” 지수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습니다.” 설득이 통하지 않자 변호사는 합의이혼서를 지수현에게 건넨 뒤, 자리를 떴다. 합의이혼서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살펴본 지수현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인한 뒤, 반지를 빼내 합의이혼서 위에 올려두었다. 이어서 지수현은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 지수현은 모든 짐을 정리했다. 지수현의 물건은 많지 않았고 허정운이 그녀에게 사준 물건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캐리어 한 개면 충분했다. 지수현은 3년간 지냈던 저택을 뒤돌아봤지만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그녀에게 속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지수현은 이 이치를 깨닫기까지 3년이 걸렸다. 하지만 늦지는 않았다. 저택에서 나오자 대문 앞에는 빨간색의 람보르기니가 세워져 있었다. 지수현을 발견한 운전자는 클랙슨을 눌렀다. 지수현은 캐리어를 차에 실은 뒤, 조수석에 탔다. 운전석에는 피부가 희고 고운, 몸매가 좋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릴 정도로 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 덕분에 얼굴은 더 작고 갸름해 보였다. 지수현이 차에 앉자 신설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마음 정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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