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성아린은 종이에 자기 이름을 사인하고 변호사를 불러왔다.
“이혼 협의서 작성해 주세요.”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성아린의 목소리에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모님. 협의서 작성하고 나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습니다. 숙려 기간이 끝날 때까지 두 분의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법원에서 이혼 서류를 처리하게 됩니다.”
“알겠어요.”
성아린이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진행해 주세요.”
변호사가 떠나자 방에는 성아린 혼자 남았다. 마음이 텅 비어서 그런지 슬퍼하는 것도 힘에 부쳐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방문이 살며시 열렸다. 성아린은 변호사가 들어온 줄 알고 눈을 떴다가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지수아였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지수아가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던 성아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모님.”
지수아는 늘 그렇듯 부드러우면서도 파리한 표정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손에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수혁이가 무슨 짓 했는지 들었어요. 내가 옆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성아린은 거짓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차가운 표정으로 지수아를 쏘아봤다. 지수아는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수혁이 이해해줘요...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혁이가 어찌나 슬퍼하던지... 나를 안고 애처럼 울더라고요. 사랑의 결실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면서요... 몇날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내 곁을 지키면서 말이죠...”
지수아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이 되어 상처투성이가 된 성아린의 마음을 마구 후벼팠다.
“그런 말을 하러 온 거라면...”
성아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지수아의 말을 잘랐다.
“이제 그만 나가봐요. 여기 지수아 씨를 반길 사람은 없어요.”
지수아는 놀란 듯 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도시락을 들어 보였다.
“그... 그만할게요. 사모님. 몸에 좋은 사골국을 끓여 왔는데 좀 먹어봐요. 먹어야 기운을 차리죠...”
“됐으니까 가져가요.”
성아린이 역겹다는 듯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순간 지수아는 겁에 질린 표정을 싹 거두고 고집스럽지만 한기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네요...”
지수아가 성큼 앞으로 다가가 무서운 힘으로 성아린의 턱을 꽉 부여잡았다. 그러더니 다른 손으로 도시락통을 들고 억지로 국을 입안에 부어넣으려 했다.
“이거 놔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성아린이 허약한 몸으로 몸부림 쳤지만 지수아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지수아가 손에 힘을 풀고 나서도 성아린은 침대에 엎드린 채 연신 기침해야만 했다. 이제는 위가 뒤틀리는 것처럼 헛구역질까지 났다.
지수아는 처참한 성아린의 몰골을 보고 나서야 천천히 손을 닦았다.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표정은 웃고 있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성아린이 고개를 번쩍 들고 불안한 말투로 물었다.
“이건 몸에 좋은 국이 아니잖아요... 도대체 뭐예요?”
지수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뚝뚝 떨궜지만 독사같은 눈빛으로 성아린을 쏘아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거...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모님 아기로 만든 거잖아요...”
쿵.
성아린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공포와 함께 구역질이 물밀듯 밀려와 성아린을 남김없이 삼켜버렸다. 침대에 엎드린 성아린은 미친 듯이 손가락으로 목구멍을 후벼파며 오장육부를 다 토해낼 기세로 헛구역질했다.
“웩. 으엑...”
지수아는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성아린의 고통을 감상했다.
“아파요? 내가 유산하던 날도 그렇게 아팠는데... 아니, 더 아팠어요. 사모님이 내게 떠나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사고 날 일도 없었겠죠. 그러면 내 아이도 멀쩡히 살아있었을 거고요. 수혁이는 이제 사모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조강지처의 신분을 과시하며 나보고 떠나라고 한 거예요?”
지수아가 한 걸음 다가서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게 다 업보예요.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건 다 사모님 탓이라고요. 내 아이를 죽인 사모님의 탓.”
“아악.”
오랫동안 꾹꾹 참아왔던 분노와 굴욕, 그리고 비통함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성아린은 온 힘을 다해 지수아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