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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느 날, 배수혁은 지수아를 아예 별장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린아, 예전 일은 다 지났잖아. 수아 몸조리도 해야 하는데 밖에서 지내는 게 걱정돼서.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 거야. 앞으로 잘 수아랑 잘 지냈으면 해...” 그날부터 오직 두 사람의 세상이었던 집은 철저히 배수혁과 지수아의 사랑터가 되고 말았다. 성아린은 어쩔 수 없이 옆에서 배수혁이 지수아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그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파에서 키스하고 식탁에서 꽁냥거리고 성아린이 연주하던 피아노 앞에서 사랑을 나눴다. 도우미들은 그 자리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잰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늦은 밤, 성아린은 다급한 발소리와 겁에 질린 비명에 잠에서 깼다. 문을 열어보니 꼴이 말이 아닌 배수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똑같이 꼴이 말이 아닌 지수아를 안고 미친 듯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게 보였다. 배수혁의 품에 안긴 지수아는 하체에서 피가 줄줄 흘렀고 고통에 몸을 웅크린 채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올라오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성아린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이 병원으로 데려오라십니다.” 성아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집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성아린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격렬한 성행위로 인한 황체 낭종 파열로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임신이었고 출혈량이 많아 상황이 매우 위급했다. 응급 수술을 하려면 혈액이 다량으로 필요한데 지수아는 특수한 혈액형인 RH-B형이라 병원에 저장된 혈액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성아린도 마침 RH-B형이었다. 배수혁은 성아린이 거절했음에도 사람을 시켜 헌혈대에 억지로 밀어 붙였다. “피 뽑아요.” 배수혁이 의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수아가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 쉬지 않고 뽑아요.” 의사가 주저했다. “대표님, 성아린 씨는 몸이 허약해서 피를 뽑으면...” “죽어도 상관없어요.” 배수혁이 의사의 말을 잘라버렸다. “수아와 내 아이는 꼭 지켜내야 해요.” ‘죽어도 상관없다니...’ 침대에 누운 성아린은 차갑기 그지없는 그 말에 문득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된 감기에 걸렸을 뿐인데 배수혁은 꼬박 3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성아린의 손을 잡고 이 말만 되뇌었다. “아린아, 얼른 나아. 너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떡해.” 하지만 지금은 성아린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허무함이 파도처럼 성아린을 덮쳤고 눈앞이 깜깜해진 성아린은 그대로 감각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성아린의 전화가 울렸다. 법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성아린 씨. 이혼 숙려기간이 끝났습니다. 이제 서류 받아 가도 됩니다.” 성아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섰다. 지수아가 있는 병실을 지나는데 배수혁이 지수아의 배에 머리를 갖다 대고 아버지가 될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서로 의지한 두 사람을 보며 성아린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제 적응한 건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시선을 거둔 성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이혼 절차를 모두 마치고 성아린은 짐 정리하러 별장으로 돌아갔다. 성아린의 이름으로 된 물건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배수혁이 선물한 거라 주얼리든 가방이든 드레스든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제일 아래층 서랍을 정리하다가 성아린은 딱딱한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안에는 그동안 모아둔 러브레터였는데 전부 배수혁이 소년 시절 써준 것들이었다. [아린아, 오늘 네가 옆 반 남자애랑 얘기하는 거 봤는데 질투 나 미칠 것 같더라. 넌 내 것이야. 내 것이어야만 해.] [아린아, 졸업하면 결혼하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 너 성아린이 나 배수혁의 여자라고 온 세상에 알릴 거야.] [여보, 오늘은 우리가 함께한 지 999일이 되는 날이야. 내 생에 가장 정확하고 가장 행복한 선택은 너를 만나고 너를 사랑한 일이야. 우리 검은 머리 파 뿌리될 때까지 늘 함께하자.] 이제 그 편지들을 봐도 눈물이 나지 않았고 손만 살짝 떨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아린은 정성껏 마련한 집을 빙 둘러봤다. 여기는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미래를 상상하던 곳이었다. 그뿐일까, 소파에 앉아 성아린을 안고 그녀가 전부라고 말했고 침대에 누워 함께 잠들며 백년해로할 것을 약속했는데 이제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트렁크를 들고 문 앞에 선 성아린은 라이터에 불을 붙여 커튼으로 던져버렸다. 불길이 소파, 러브레터, 그리고 피아노까지 무서운 속도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성아린은 마치 16살의 배수혁과 16살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벚나무 아래를 활보하며 장난치고 있었다. 배수혁이 성아린의 머리카락를 잡아서 당기면 성아린이 성질을 부리며 배수혁을 잡았다. 그러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점점 옅어졌다. 성아린이 가볍게 웃더니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장을 떠났다. 그리고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스타에 피드 하나를 올렸다. [16살, 너는 내게 평생 사랑하겠다고 말했지. 그리고 20살, 결혼하면서 신부님께 영원히 충성할 것을 맹세하겠다고 말했어. 25살, 너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고, 오늘 우리는 이혼했지. 네가 먼저 맹세를 저버렸으니 나도 내 진심을 거둬 가려 해. 앞으로 나는 모래성에 사는 배 여사님이 아닌 나, 성아린으로 살아갈 거야. @배수혁] 피드가 성공적으로 업로드되었다는 알람이 뜨자 성아린은 핸드폰을 끄고 카드를 빼서 좌석 앞에 있는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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