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나영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소희가 먼저 말을 건넸다. "나영재, 어딜 보는 거야." "볼 일이 있어서." 제 발 저린 나영재는 말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얘기 좀 하자고." 안소희는 머리를 닦으며 문을 조금 더 열었다. "허가윤과 서도훈에 관한 얘기라면 난 더이상 할 얘기 없어." "아니야." 나영재는 안소희의 태도가 싫었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했다. 나영재는 안소희의 정체가 알고 싶었다. 샤워를 마친 안소희도 기분을 가라앉혔던지라 수건을 놓은 후 입을 열었다. "말해 봐, 뭔데." "네 본가에 한번 찾아가고 싶어서." 나영재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결혼하고 이혼까지 2년 동안 네 부모님도 찾아뵙지 않은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필요 없어." 안소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하다는 말만 드리고 올게, 너무 폐를 끼치진 않을 거야." 나영재는 어두운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안소희의 태도는 여전했다. "아니, 괜찮아." "왜 계속 거절하는 거야. 설마 진짜 무슨 비밀이 있는 건 아니지?" 나영재는 성진영의 말이 떠올랐다. "맞아, 우리 집 너무 부자라서 그래." 안소희는 맑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집에 갔다가 재산을 탐내서 이혼도 안 하고 내 돈으로 허가윤이랑 놀아날까 봐." 나영재는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믿음이 하나도 안 갔지만, 나영재는 그래도 속아주는 척하며 물어보았다. "재벌가와 기업은 내가 다 알아, 넌 어느 집안인데?" "안진그룹." 안소희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정체를 들킬 일은 없었다. 업계 사람들은 안진그룹에 딸이 있다는 걸 알지만, 공식적으로 공개된 건 안소희의 동생이었다. 안소희는 어릴 때부터 사람과 만나는 걸 싫어했기에 안진그룹의 장녀라는 사실은 친구와 친척 말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헛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나영재는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믿었으며, 그저 안소희는 대체 정체가 뭘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안진그룹의 딸은 나도 만났었어. 너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래." 안소희는 덤덤하게 내뱉었다. 안소희와 동생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안소희는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하고, 동생은 화려한 스타일을 좋아해 동화 속의 공주처럼 귀엽고 발랄했다. "잠깐만 다녀올게, 절대 폐는 안 끼칠 거야." 나영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할 때도 안 갔는데 지금 왜 가?" 안소희는 쿨하게 말을 이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약 올리러 가는 줄 알겠네." "전에 안 갔으니까..." "정말 찾아뵙고 싶었다면 왜 지금까지 미뤘는데?" 안소희는 처음으로 예의 따윈 무시하고 나영재의 말을 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할게. 필요 없어." 나영재는 안소희가 진심으로 싫어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안소희의 성장 환경이 궁금해졌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주소도 검색해 봤으나, 그저 서울의 평범한 아파트일 뿐이었다. "왜 계속 못 가게 하는 거야?" 나영재는 대놓고 물어보았다. "누구한테 못 볼 꼴 보여주기 싫어서." 안소희는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찾아가서 결혼 2년 만에 이혼했다고 하면, 아버지와 그 여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간단한 한마디에 나영재는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안소희는 가족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며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머님을 찾아뵐게." 나영재는 말을 돌렸다. 스킨을 바르려던 안소희는 순간 멈칫하더니 잠깐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나영재는 안소희의 이상한 안색을 눈치챘다. 계속 설득하려던 그때, 안소희는 정신을 차리고 스킨을 들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돌아가셨어." 이 말을 들은 나영재는 가슴이 아려왔다. 무수한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너..." 나영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얘기 없으면 오늘은 이만하자." 안소희는 화장품을 제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법원 가야지." 나영재는 어두운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찍 자." "응." 안소희는 덤덤하게 답했다. 나영재는 더이상 방해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문틀에 닿을 듯한 큰 키의 나영재는 손잡이를 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안소희를 보더니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방에서 나갔다. 그날 밤. 둘은 잠을 설치고 말았다. 나영재는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내일이면 이혼 도장을 찍는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안소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조차 몰랐던 자신이었다. 안소희는 연이은 악몽에 잠을 설쳤다. 악몽의 끝은 항상 엄마가 다정하게 안소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며 "소희야, 무서워하지 마. 엄마는 항상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다음,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엄마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치며 잡으려고 해도, 엄마의 손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엄마!" "엄마!" 어린 안소희와 성인이 된 안소희가 동시에 엄마를 쫓아가지만,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엄마가 사라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안소희는 눈을 번쩍 떴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침대에 한참 누워있은 후, 안소희는 그제야 복잡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켜 베개에 몸을 기댔다. 이런 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였다. 물을 마시려던 안소희는 텅 빈 컵을 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을 받아오기로 했다. 그러나 불을 켜진 않았다. 안소희는 아침보다 밤이 더 편했다. 어두컴컴한 밤에는 어떤 거짓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며, 끝없는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안소희는 물을 따르고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꿈속의 모습을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안소희는 최대한 엄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무 그리워하면 엄마가 걱정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통제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퍽!" 안소희는 실수로 물을 마시러 내려온 나영재와 부딪히고 말았다. 컵에 가득 담긴 물은 거의 다 나영재 옷에 쏟았고, 안소희의 옷에도 조금 묻었다. 안소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영재의 목소리가 울렸다. 막 잠에서 깬 탓인지 나영재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무거웠다. "왜 불을 안 켜?" "안 켜도 상관없어." 안소희는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말을 아꼈다. 나영재는 옆으로 다가가 불을 켰고, 집은 순간 낮처럼 환해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안소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시 천천히 눈을 뜨며 빛에 적응한 안소희의 시선은 앞에 있는 나영재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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