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누워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고의찬과 함께 자라며 고의찬이 친아버지처럼 여겼던 집사였다.
억제할 수 없는 충격에 하가윤은 옆에 있던 의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같이 온 다른 사람은요? 그 사람은 어디에 있어요!”
“그분은 다치지 않으셨고 옆... 옆 병실에서 휴식 중입니다.”
하가윤은 수술실에서 어떻게 병실로 걸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하준호를 보았을 때 가슴속 깊숙이 눌러뒀던 억울함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하준호의 품에 엎드려 심장이 찢어지는 듯 울었다.
“아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하준호는 하가윤의 야윈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작정하고 우리를 노렸어. 이 집사가 나를 밀치지 않았다면 수술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나였겠지.”
하가윤은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준호가 하가윤을 보러 올 거라는 소식은, 고의찬의 비서와 이 집사 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손을 쓴 사람은 고의찬이라는 것이었다.
하가윤은 참지 못하고 냉소를 터뜨렸다. 고의찬은 모든 계산을 다 했지만 이 집사가 몸으로 그 차를 막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준호의 귀에 다가가 몇 마디 속삭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민효영이 있는 VIP 병실로 걸어갔다.
복도 창문 너머로 고의찬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민효영을 바라보며 자상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칼에 베이듯 아팠지만 마음을 진정시킨 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고의찬, 이제 만족해!”
민효영의 손목에 나비 리본을 묶는 데 집중하고 있는 고의찬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게. 하지만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그걸 핑계로 연기하겠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하가윤은 순간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바로 그때 고의찬의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큰일 났습니다! 고 대표님, 작은 도련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순간 눈시울이 빨개진 민효영은 고의찬의 손을 꽉 잡으며 울부짖었다.
“의찬 씨, 나는 유현이 없이는 못 살아!”
고의찬은 가슴 아픈 얼굴로 민효영을 품에 안은 뒤 비서를 향해 고함쳤다.
“모든 수단 다 동원해서 찾아! 못 찾으면 너도 돌아오지 마!”
“고 대표님, 작은 도련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곳은... 사모님의 별장입니다.”
비서가 전전긍긍하며 말하자마자 고의찬은 바로 고개를 돌려 하가윤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가윤 또한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의찬이 조사해 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죽은 사람이 그녀의 아빠 하준호가 아니라 이 집사라는 소식을 숨기려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하가윤은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코웃음을 쳤다.
“맞아, 내가 보냈어.”
“하가윤! 너 왜 이리 지독해! 유현이 이제 고작 네 살도 안 된 아이야!”
고의찬은 한마디 하자마자 바로 하가윤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말이다.
“만약 유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린 고의찬은 민효영이 병상에 쓰러진 것을 보자 바로 하가윤을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민효영을 안아 든 뒤 큰 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아픈 목을 움켜쥐고 있는 하가윤은 그렇게 텅 비어 있는 쌀쌀한 VIP 병실에 혼자 갇혔다.
문밖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
하가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자주 저혈당이 오곤 했다.
그런데 며칠 밤낮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눈앞이 점점 더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뒤 창문을 두드려 경호원에게 음식을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서 반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고의찬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만 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고 대표님께서 작은 도련님을 찾을 때까지 음식이나 물을 절대 주지 말라고 하셔서요.”
얼마나 지났을까, 고의찬의 차가운 목소리가 창가 너머로 울려 퍼졌다.
“유현이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마지막 기회를 줄게, 본가로 돌아가서 고씨 가문 안주인 역할이나 충실히 해, 하씨 가문은 내가 지켜줄게.”
가슴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가윤은 눈을 꼭 감고 꾹 참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쥐 죽은 듯 조용한 주위에 고의찬의 목소리만 들렸다.
“착하네.”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회사의 네 자리, 효영이가 대신 맡아서 일할 거야. 그러니까 괜히 효영이 난감하게 하지 말고 입단속 잘해.”
저혈당이 심하게 온 하가윤은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희미해졌다.
인생이라는 긴 드라마를 고의찬과 함께 계속 만들어 나갈 수 있지만 결말은 반드시 자신이 쓰리라 다짐했다.
간신히 눈꺼풀을 떠 고경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병원에 와서 아빠 좀 도와줘.]
그러고는 의식을 잃었다.
...
하가윤은 병원에서 이틀만 쉬고 다시 회사에 출근했다.
하준호가 ‘돌연사’했다는 소식은 이내 기자들에 의해 외부에 새어 나갔다. 그러자 주주들이 하나같이 나와 따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점인 만큼 반드시 하가윤이 나서서 주주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주주총회가 끝나자마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발로 쾅 차며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든 순간 잔뜩 어두워진 고의찬의 얼굴을 발견했다.
“하가윤, 너 대체 무슨 짓했는지 좀 봐!”
하가윤을 창문으로 밀어붙이며 회사 정문을 내려다보라 강요했다.
빼곡하게 늘어선 사람들과 카메라가 햇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고우 그룹 직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현수막을 들고 무언가 외치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위층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글씨가 큼지막하게 써 있었다.
[망할 년, 고우 그룹에서 꺼져! 몸 함부로 굴리는 연예인은 회사에 들어올 자격 없어!]
창문에 짓눌린 하가윤은 숨을 내쉬기 힘들었지만 고의찬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고의찬, 너만 떳떳하면 주위 사람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 만약 민효영이 그런 연예인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분노하겠어, 그리고 너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
찰싹!
하가윤은 순간 볼이 화끈거렸다.
고의찬도 더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듯 가슴이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하가윤을 향해 고함쳤다.
“이제 만족해? 우리 고씨 가문 상속자 생모가 몸 함부로 굴리는 연예인이라는 걸 전 세계 사람이 다 아니까 좋아?”
“아직 멀었어.”
처음 보는 고의찬의 무력한 모습에 하가윤은 큰 소리로 웃었다.
‘고의찬,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야. 하씨 가문의 골수를 빨아먹으려 하면서 계속 나더러 고씨 가문 안주인 꼭두각시 노릇을 하라고.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지!’
“하가윤, 너 정말 미쳤구나!”
분노에 찬 고의찬은 문을 쾅 닫고 자리를 떴다. 하가윤은 혼자 통유리창 앞에 서서 고우 그룹 정문 앞에 모여드는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몇 분 후, 고의찬이 다시 돌아오더니 하가윤의 팔을 붙잡고 로비 한가운데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기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했다.
“여러분, 효영이에 관한 뉴스는 모두 제 약혼녀가 꾸며낸 것입니다. 질투심이 강해 온라인에 허위 정보를 유포한 거니 하가윤이 한 말은 절대 믿지 마십시오.”
고통 가득한 얼굴로 한마디 외친 고의찬은 하가윤의 귀에 다가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네 아빠 생각해 봐, 그리고 하씨 가문도 있는데...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