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말을 마친 강서준이 이수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휙 가버렸다.
이진아는 휴대폰에 찍힌 번호를 바라봤다. 조금 전의 남자는 자신을 약혼자라고 칭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걱정하는 말 한마디 없이 오로지 이수아를 감싸기에 바빴다.
누군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 너무도 아팠다. 그녀의 얼굴이 핏기라곤 없이 창백해졌다.
이수아는 멀쩡해 보였지만 정작 비난받은 이진아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길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저런 남자가 내 약혼자라고?’
실종된 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가족들조차 연락 한번 없었고 머릿속에 남자 친구의 그림자만 어른거렸다.
이진아는 망설임 없이 그 번호를 눌렀다. 휴대폰 너머로 비서 같은 딱딱한 말투가 들려왔다.
“이진아 씨?”
“안녕하세요. 혹시 강현우 씨 되시나요? 제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것 같은데...”
“대표님께서 막 회암으로 돌아오셔서 지금 재활 치료 중이십니다. 이진아 씨 지난번에도 교통사고 났다면서 대표님께 전화해서 모시러 오라고 했죠? 그러다가 두 분이 진짜 교통사고를 당했고요. 이진아 씨, 양심이 있다면 더는 대표님께 연락하지 마세요.”
“근데 저...”
뚜, 뚜, 뚜...
상대가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진아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기댔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이 밀려왔다.
고개를 숙여 잠금 해제된 휴대폰을 내려다봤는데 다행히 결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이 카드 결제되는지 봐주실래요?”
이전 결제 내역을 보니 일주일 전에 4천만 원을 긁은 기록이 있었는데 남성용 커프스 버튼을 샀다. 그렇다면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이진아 씨 구조 비용과 입원비 모두 합쳐서 400만 원이에요.”
맑고 깨끗한 이진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지난주에 4천만 원이나 썼는데 왜 카드에 400만 원도 없는 거지?’
그녀는 휴대폰에서 엄마라고 저장된 번호를 찾아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한테 전화할 줄 알긴 아네? 이진아, 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수작을 부려? 서준이가 진작 너 몰래 수아를 만나고 있었어. 근데 수아는 네가 상처받을까 봐 말하지 않은 건데 둘이 고작 키스하는 걸 봤다고 수아를 데리고 나가서 교통사고까지 내? 정말 너 때문에 속 타서 죽겠어. 차라리 그냥 밖에서 죽어버려. 수아는 항상 언니인 널 먼저 생각하는데 넌 이런 치졸한 짓만 골라 하고. 내가 어쩌다 너처럼 이렇게 독한 애를 낳았는지 모르겠어.”
이진아가 뭔가 물어보려던 그때 이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언니 이번에 기억을 잃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적당히 해요.”
“기억을 잃어? 1년에 대체 기억을 몇 번이나 잃는 거야?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어쩜 매번 똑같은 수법이야? 재주가 있으면 평생 돌아오지 말라고 해. 쟤 때문에 내가 먼저 화나서 쓰러지겠어. 수아 너도 말리지 마. 그동안 그렇게 당하고 억울하지도 않아? 서준이가 먼저 너한테 고백했는데 진아 쟤가 서준이한테는 감히 뭐라 하지 못하니까 너만 괴롭히잖아.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진아는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전화 속 이 여자가 정말로 그녀의 친어머니란 말인가? 강서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안부는 전혀 묻지 않았다.
이진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진짜 우리 엄마 맞아요?”
‘딸한테 이렇게 모질게 대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무슨 뜻이야? 내가 화병으로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날 엄마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나야말로 너처럼 창피한 딸이 없었으면 좋겠어. 서준이를 쫓아다니면서 추한 짓을 그렇게나 많이 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어떻게 수아 건 뭐든지 다 빼앗으려고 들어? 내가 수아한테 차를 한 대 더 사줘도 화를 냈어. 수아를 동생이라 생각하긴 한 거야? 당분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연락도 하지 마. 기억 잃었다며? 그럼 돌아오지도 마. 우리도 좀 조용하게 있자. 재수 없는 년.”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던 이진아는 마음의 고통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얼굴이 축축해져 손으로 만져보니 눈물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SNS를 확인했는데 이수아가 올린 게시물을 발견했다.
사진 속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회암시 강변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구도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가족과 함께.]
반사된 거울에 강서준과 중년 남녀 두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비쳐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