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심윤서는 창고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분노에 찬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얼마 전 강하연을 인공 호수에 밀어 넣었던 그자였다.
“이런 쓸모없는 자식들! 강하연을 잡아 오랬잖아.”
남자는 경호원들을 노려보며 소리쳤고, 그들은 불안에 떨고만 있었다.
“저희는 전우빈 쪽 친구에게서 강하연이 공항으로 간다는 말을 직접 들었습니다.”
경호원의 변명에 심윤서의 얼굴이 굳었다. 오늘 서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린 사람은 오직 전우빈뿐이었다.
‘설마 전우빈이 일부러 나를 덫에 걸리게 한 건가?’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심윤서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때 한 경호원이 의자에 묶인 그녀를 난폭하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전우빈이 며칠 전 부산의 잘나가는 자제들을 불러 모아 네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게 했다지?”
인공 호수에 강하연을 밀어 넣었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를 위해 그 정도까지 했다는 건, 네가 전우빈에게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 아니야?”
심윤서가 할 말을 찾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를 거세게 밀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내 동생이 전우빈 때문에 죽었어. 그 자식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다면, 너라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가 옆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손짓하자 경호원들의 주먹이 심윤서에게 퍼부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웅크렸지만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평생 부모와 오빠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심윤서는 이런 폭력과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지만 눈물만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우빈, 이게 네가 원했던 거야?’
의식이 흐려져 갈 무렵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자 활짝 열린 창고 문 너머로 햇빛을 등진 커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심윤서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 침대맡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심하준을 알아본 심윤서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오빠?”
심하준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윤서야, 정신이 드니?”
“오빠가 나를 구해준 거예요?”
심하준의 얼굴에 걱정과 분노가 스쳤다.
“괜찮아? 오빠가 너무 늦었지?”
심윤서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어리석게도 전우빈이 나타나 구해주길 바랐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부산 놈들, 감히 내 동생에게 손을 대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나 심윤서의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보자 그의 말투는 누그러졌다.
“일단 몸 상태가 좀 안정된 것 같으니, 오늘 같이 서울로 돌아가자.”
“안 돼요, 오빠.”
심윤서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주신 만년필을 교실 사물함에 두고 왔어요. 그걸 꼭 찾아야 해요.”
병원을 나서며 심윤서는 자신이 이틀 동안이나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처가 아문 몸을 이끌고 심하준의 동행 제안을 뿌리친 채 심윤서는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몇몇 여학생들이 강하연을 둘러싸고 화장하고 있었다. 오늘이 졸업 파티 공연 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심윤서는 무관심한 듯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만년필을 쥐고 나오려는 그때 한 여학생이 그녀를 발견하며 비웃듯 말을 걸어왔다.
“이게 누구야? 파티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쉬웠어?”
옆에 있던 다른 여학생이 맞받았다.
“역할이 맘에 안 들면 솔직히 말하지,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백설 공주역이 탐나서 돌아온 거 아니야?”
심윤서가 그들의 조롱을 무시한 채 자리를 뜨려는 순간 강하연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강하연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눈빛은 불안정해 보였다.
“심윤서, 떠난다고 하지 않았어? 왜 돌아온 거야? 전우빈을 뺏으러? 아니면 백설 공주 역할을?”
심윤서가 떠난다는 사실을 강하연이 알 리가 없었다. 전우빈이 말해줬음이 분명했다.
심윤서는 말다툼을 원치 않았다. 강하연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손아귀가 더욱 세게 조여왔다.
“심윤서, 백설 공주역은 양보할게. 하지만 전우빈만은 안 돼.”
심윤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강하연은 눈썹 칼을 집어 들고 자기 손목을 내리그었다.
찰나의 정적을 깨고 선홍색 피가 튀어 오르며 교실은 비명으로 뒤덮였다.
“강하연!”
급박한 외침과 함께 전우빈이 달려왔다. 그는 피로 물든 강하연을 보더니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심윤서를 돌아보았다.
“심윤서, 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는 쓰러진 강하연을 안고 교실 문을 향했다.
뒤에서 한 여학생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강하연이 이렇게 가면 우리 백설 공주역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전우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심윤서를 노려보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연기하고 싶은 사람이 이미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