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송유서는 막 몸종에게 짐을 챙기라 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전각 문이 거칠게 열렸다.
최윤영이 여러 궁녀와 나인들을 거느린 채 잔뜩 기세를 올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선홍빛 세자빈의 궁중 복색 차림에 화장 또한 정갈했고 눈썹과 눈매는 그림을 그린 것처럼 고왔으나 눈빛에 서린 독기와 자만이 그 미모를 해치고 있었다.
최윤영은 곧장 침상 앞으로 다가와 내려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 년 동안 다섯 아이를 낳았으니, 숙빈, 네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송유서는 눈을 내리깔고 순종적인 어조로 답했다.
“소첩은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하면, 어디 말해 보아라. 무엇이 잘못이냐?”
최윤영의 목소리는 날카롭고도 매서웠다.
송유서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결국 떠도는 추문을 스스로 입에 올리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되뇌었다.
“소첩은... 요사스러운 여인이고 온갖 수단으로 세자저하를 유혹하였으며 염치도 몰랐습니다.”
최윤영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보아하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랑으로 아는 모양이구나? 숙빈, 잘 들어라. 저하의 마음에는 오직 나 최윤영뿐이다! 중전마마께서 내 목숨으로 협박하지 않았다면 저하께서는 너를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와 아이를 여럿 둔 것도 네가 유혹해서가 아니다. 자손을 잇기 위한 일일 뿐이었다! 너는 그저 아이를 낳는 수단에 불과하다!”
“예, 소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송유서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세자저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은 오직 세자빈마마이시며 소첩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녀는 이 모욕이 하루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이 재앙 같은 인물을 어서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의 최윤영은 유난히 분노가 컸다.
이원이 보낸 보약 이야기를 듣고 질투가 일었는지도, 아니면 고분고분하면서도 여전히 맑은 얼굴이 눈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갑자기 손을 들어 송유서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송유서는 머리가 돌아갈 만큼 얻어맞아 뺨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는 피가 맺혔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최윤영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전혀 뉘우칠 줄을 모르는구나!”
최윤영이 냉소했다.
“여봐라! 숙빈 송씨가 언행이 방자하고 요사하게 주인을 홀리며 감히 세자빈인 나를 거슬렀다! 당장 뺨 스무 대를 쳐서 분수를 똑똑히 알게 하여라!”
건장한 나인 둘이 곧장 다가와 좌우에서 송유서를 붙잡았다.
“마마!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송유서의 몸종 녹주가 털썩 무릎을 꿇고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저희 마마께서는 막 해산을 마치셔서 몸이 허약하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최윤영은 녹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심장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천한 계집이 감히 어디서 입을 놀리느냐! 이 계집애도 끌어내어 몽둥이로 쳐 죽여라!”
녹주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웅크려졌다.
송유서는 얼굴의 통증도 잊은 채 몸을 비틀어 최윤영을 바라보았다.
“세자빈마마! 잘못은 소첩에게 있습니다. 녹주는 죄가 없으니 부디 살려 주세요! 녹주를 살려주신다면 소첩이 마마의 분이 풀릴 때까지 기꺼이 맞겠습니다!”
녹주를 벌하는 것보다 송유서를 직접 짓밟는 편이 최윤영에게는 훨씬 통쾌했다.
그러자 최윤영은 코웃음을 쳤다.
“주종 간의 정이 깊구나. 좋다, 기회를 주마. 계속 쳐라! 내가 멈추라 할 때까지!”
“마마! 아니 되옵니다! 소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사옵니다! 마마!”
녹주는 문밖으로 끌려가며 절규했다.
퍽, 퍽, 퍽.
매서운 손바닥이 쉴 새 없이 송유서의 얼굴을 내리쳤다. 처음에는 살을 태우는 듯 아팠고 이내 둔한 통증으로 변했다. 입안에는 쇠 비린내 같은 피 맛이 가득 찼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커지며 의식이 멀어져 갔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침전 밖 회랑의 그늘에 서 있는 익숙한 장신의 그림자를 본 듯했다.
검은 바탕에 금실이 수놓인 도포 자락, 소나무처럼 곧은 자태... 바로 이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맞는 모습을, 애원하는 모습을, 최윤영이 제멋대로 날뛰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마지막 손찌검이 떨어지자 송유서는 피를 토하며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송유서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 누군가 얼굴에 약을 바르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약 기운이 화끈한 통증을 누그러뜨렸다. 아직 눈은 뜨지 못했지만 말소리는 들려왔다.
이원과 그의 곁을 지키는 상선 덕안의 목소리였다.
“...저하, 이미 이곳을 밤새 지키셨사옵니다. 의원 말로는 숙빈마마께서 큰 탈은 없으시다 하니 이제 돌아가 쉬시지요.”
“그럴 필요 없다.”
이원의 목소리는 쉰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숙빈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
덕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낮췄다.
“저하, 소인이 주제넘은 말씀 하나 올리옵니다만... 그토록 숙빈마마가 염려되셨다면, 그때 분명 문밖에 계시며 세자빈마마의 행동을 보셨을 터인데... 어찌하여 나서서 말리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때 문밖의 그림자는 역시나 그였다.
송유서의 심장이 차가운 손에 붙잡힌 듯 세차게 죄어들었다.
‘그래, 왜였을까.’
‘저하께서는 바로 밖에 있으면서 내가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도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이내 이원의 대답이 들려왔다. 낮고 평온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송곳처럼 박혔다.
“나는 세자빈에게 맹세했다. 이생에 단 한 사람만 마음에 품겠다고. 숙빈을 들인 것부터가 이미 그 약속을 어긴 일이니 세자빈이 겪은 억울함이 적지 않다. 마음속 분노를 풀지 못하면 오히려 병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송유서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 차가움은 뼛속에서 스며 나와 사지로 퍼져 나갔다.
그저 최윤영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산후로 허약한 그녀가 맞아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 것이었단 말인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토록 용납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옳고 그름도, 상처도, 심지어 다른 한 사람의 목숨과 존엄까지도 외면할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