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윤재헌과 결혼한 지 4년째 되던 해, 한서율은 아이를 가졌다.
산모 등록을 위해 한빛병원을 찾은 그녀는 접수대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상하네요. 시스템상 미혼으로 표시되는데요.”
불길한 예감에 곧장 구청으로 달려간 한서율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윤재헌 씨는 이미 혼인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배우자는 한세린 씨네요.”
한세린... 그녀의 이복언니이자, 윤재헌의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결혼식 당일에 윤재헌을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알려진 건, 그녀가 자신의 꿈을 좇아 홀로 해외로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헌 씨 아내가 세린 언니라고?’
...
구청을 나온 한서율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두 다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청거렸고, 눈빛은 초점 없이 공허했다.
그녀는 길가에 멈춰 서 있던 택시로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열고 힘없이 뒷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딸깍.
문이 닫히는 순간,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고요한 차 안에서 오래 참아온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시간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한세린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한서율은 가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대신 신부가 되었다.
윤재헌의 태도는 처음부터 냉담했다.
하지만 한서율은 단 한 번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셔츠 깃 하나, 식사 한 끼까지도 세심히 챙기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윤재헌의 마음속에 쌓였던 단단한 벽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일정을 제멋대로 바꿔도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서툰 농담에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중요한 서류를 그녀에게 맡길 만큼 신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시선과 말투에는 어느새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건네고 최고급 레스토랑에도 자주 데려갔다.
새벽녘, 그녀가 무심코 마카롱을 먹고 싶다고 중얼거렸을 때는, 직접 차를 몰아 반나절 거리의 가게까지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우리 서율이처럼 먹을 걸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 봤네.”
윤재헌의 웃음 속에서 그녀는 느꼈다. 그가 이제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하지만 두 달 전, 암 진단을 받은 한세린이 귀국했다.
...
그날 밤, 한태성은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무거운 침묵이 거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그는 입을 열었다.
“세린이가 암 말기래. 의사 말로는 길어야 반년이란다...”
한태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린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다고 한 소원이 하나 있대. 바로 재헌이랑 결혼하는 거야. 그러니까, 서율아... 잠시만 물러나 있어 줘. 네 언니가 떠나면 그때 다시 네 자리로 돌아오면 돼.”
장미영은 울먹이며 한서율의 옷깃을 붙잡았다.
“서율아... 네 언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라는 소원이야.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양보해 주라.”
한세린 또한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애원했다.
“서율아... 나한텐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제발 부탁이야... 죽기 전에 내 부탁 한 번만 들어줘.”
한서율은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가 되어, 가슴을 후벼팠다.
“전에는 저를 인형처럼 결혼식장에 세워놓고 이제는 그 자리를 다시 빼앗으려는 거예요? 다들 지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울분 섞인 외침에도, 한태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방에 가두고 외출을 금지시켰다.
“세린이 결혼 받아들이기 전엔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 하지 마.”
사흘 후, 윤재헌이 한태성 앞에서 찻잔을 내던지며 분노를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열흘 뒤엔 ‘윤재헌, 공식 입장 발표 내 아내는 오직 한서율뿐.’이라는 헤드라인이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
그리고 2주 후, 그는 한씨 가문과의 모든 계약을 중단하며 압박을 가했다.
그로부터 한 달째 되는 날, 마침내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한서율은 맨발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윤재헌이 감당해 왔던 일들이 단숨에 스쳐 지나가며 꾹 눌러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가슴이 요동치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그때, 그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율아, 미안해. 아버님, 어머님이 무릎까지 꿇으셨어. 두 가문의 체면을 생각하면... 세린이와 가짜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야. 내 아내는, 언제나 너 하나야.”
그 순간, 한서율의 심장은 바닥 깊숙이 잠기는 듯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을 할퀴는 고통이 밀려왔다.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를 바라보던 한서율은, 이내 안쓰러움이 밀려와 윤재헌의 야윈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재헌 씨는... 이미 충분히 해줬어요.”
그 후, 한세린은 세상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그의 옆자리에 섰다.
윤재헌은 직접 반지를 끼워주며,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한서율에게 다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균열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병문안이라며 한세린 곁을 찾던 그가, 이젠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그녀가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면 윤재헌은 달래듯 말했다.
“오해하지 마, 세린이한테 감정은 없어. 그냥 친구로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거야.”
한서율은 그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믿음을 무참히 짓밟았다.
...
택시가 라온 그룹 빌딩 앞에 멈춰 섰을 때, 한서율은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았다.
손에는 가짜 혼인신고서가 꼭 쥐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윤재헌의 비서 오지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사모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재헌 씨 찾으러요.”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라... 만나 뵙기 어려우실 겁니다.”
한서율은 그 말을 흘려듣고 곧장 사무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재헌아, 내 눈을 보고 대답해.”
한세린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의 넥타이를 움켜쥐고 손끝으로 가슴께를 짚었다.
“여기, 네 심장은 한 번도 날 잊은 적 없지?”
윤재헌은 잠시 눈을 피했다가 낮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한세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착각이라고? 그럼 왜 서율이랑 가짜 결혼까지 했는데? 날 돌아오게 하려던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막 귀국하자마자, 바로 나랑 혼인신고를 한 거고. 게다가 네 일기장에 썼던 그 말... ‘서율이와의 결혼은 널 되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도 다 거짓이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재헌은 그녀의 목덜미를 확 끌어당겼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모든 말이, 격렬한 키스 속에 삼켜졌다.
“그래. 나는 한 번도 널 잊은 적 없어. 그러니까, 한세린... 네가 내게 빚진 마음, 어떻게 갚을 생각이야?”
문밖에 서 있던 한서율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얼음물 속에 잠긴 듯, 감각이 하나둘 사라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윤재헌은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세린이는 내 과거일 뿐이야. 지금 내 마음은 너에게 있어.”
참, 우스웠다.
그가 말하던 진심이란 결국 거짓으로 꾸며진 말뿐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처음부터 허상에 불과했다.
한서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이를 악물며 버텼다.
이게 윤재헌의 선택이라면, 그녀는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음껏 날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