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4화

서나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구원에 들러 임시 숙소 열쇠를 받았다. 꼭대기 층 구석방이지만 아늑해 보름을 버티기엔 충분했다. 그녀가 묵직한 종이상자와 집에서 챙겨온 잡다한 물건과 책들을 들고 계단 위로 향하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 유재민, 그리고 그의 옆에서 서류를 들고 웃으며 걷던 채유진. 앞을 보지 않고 걷던 채유진은 하마터면 서나연과 부딪칠 뻔했다. “나연 언니, 이게 뭐예요? 엄청 무겁죠? 제가 들어드릴게요!”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활짝 웃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나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요. 제가 들고 갈게요.” “에이, 저 힘 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채유진이 다시 손을 내밀려는 순간, 그동안 아무 말 없던 유재민이 조용히 다가와 박스를 받아 들었다. 그걸 본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그 손은 연구용이에요. 거의 국가 보물 수준인데 이런 육체노동은 시키면 안 되죠!” 유재민은 채유진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더 귀한 사람이지.” 목소리는 가볍고, 친근했고,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그 한마디는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이었는데 서나연은 심장 한가운데가 날카롭게 찔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처음 유재민의 조교를 시작했을 때, 논문과 서류를 한가득 들고 오다 손에서 쏟아져 바닥에 흩어졌고 정신없이 주워 담던 순간 그가 지나갔다. 그때 서나연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실수로 자신이 평가받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멈춰 서서 내려다보기만 했고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갔고 떨어진 물건은 하나도 주워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행정팀에서 서류 운반용 작은 손수레가 도착했다. 그게 유재민의 방식이었다. 직접 도와주지는 않지만 필요한 조건은 마련해주는 것. 유재민은 절대 힘든지, 뭐가 필요한지, 직접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그의 온기를 서나연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지금, 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 웃어 보였다. “선배님, 또 절 놀리시는 거죠?” 유재민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몇 층 가?” “4층.” 서나연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둘은 자연스레 그녀의 앞에서 걸었고 계단을 오르며 실험 얘기를 이어갔다. 유재민은 큰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채유진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고 익숙한 마치 오래 사귄 연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의 뒤를 서나연은 조용히 따라갔다. 솔직히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그녀가 있던 자리는 늘 여기였으니까. 옆이 아닌 뒤, 같이 걷는 게 아니라 따라가는 자리. 유재민이 점점 더 멀어질 때도,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을 때도 서나연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갔다. 하지만 절대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402호 앞, 서나연이 문을 열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침대, 책상, 옷장 하나에 작은 화장실. 생각보다 너무 깔끔했지만 조금 좁았다. 유재민은 박스를 놓으며 방을 둘러보다가 그제야 물었다. “왜 여기 살아?” 서나연은 캐리어를 방 안에 들여놓으며 대답했다. “집을 팔았어.” 혹시라도 다른 질문이 올까, 꾹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라도 비칠까 봐 불안해했지만 몇 초 후 돌아온 건 이런 말뿐이었다. “불편하면 다른 데 구해. 이런 데서 살면서 스스로를 낮출 필요 없잖아.” 서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재민은 늘 이런 식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사정은 봐주지 않았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나연이 어떤 이유로 집을 팔았는지, 마땅히 갈 곳은 없는지,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서 살겠다고 결정했는지. 유재민은 관심조차 없었다. 아니, 아예 어젯밤 했던 말도 진지하게 듣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말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곧, 채유진이 뒤에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연 언니, 정리 먼저 하세요. 저희는 데이터센터에 다녀올게요.” 유재민은 그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채유진과 함께 걸어 나갔다. 이내 문이 닫히고 방과 복도가 고요해지자 서나연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문 앞에 놓인 박스와 손에 남은 붉은 자국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스스로를 낮추지 말라고?’ 사실 이런 데서 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짜 서러움은 수년간 쏟아부은 마음이 가볍게 무시되었다는 것. 헌신은 송금으로 대신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까지 던지며 유재민을 지켰던 일은 겨우 미안함 섞인 결혼 약속으로 변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재민을 웃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서나연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걸 뒤늦게 깨닫자 그녀는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그 쓰라림은 소리 없이 가슴 깊은 곳까지 번져왔다.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