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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윤이슬은 서울 상류사회에서 가장 고고하고 차가운 매력을 가진 인물로 통했다. 수많은 재벌 2세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했으나 결국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앞에 기억을 잃은 젊은 청년이 나타났다. 강원도 대관령의 양떼목장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던, 이름이 혁이라는 남자였다. 키는 훤칠했고 얼굴은 한눈에 시선이 멈출 만큼 잘생겼다. 말수는 적지만 마음만큼은 뜨겁게 그녀 곁을 지켰다. 평생 결혼에 뜻이 없던 윤이슬조차도 그가 99번이나 청혼을 반복하자, 결국 마음의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서울로 돌아와 혼인신고를 하려던 날, 혁이는 문득 집안의 오래된 규칙이 떠올랐다. 그날의 운세 풀이에서 길운이 떠야만 혼인이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그가 99번이나 운세를 보았음에도 결과는 단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 액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윤이슬이 임신했을 때, 100번째 운세를 봤는데 그마저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또다시 액운이었다. 윤이슬의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혁이는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액운이라는 결과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며 반드시 윤이슬, 아이와 함께 가정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혼인신고를 하러 가던 길, 누군가 뒤에서 고의로 차를 들이박았다. 혁이는 충돌 직후 범인의 공격에 쓰러졌고 윤이슬은 잔혹한 납치범들에게 끌려갔다. 구조되었을 때 윤이슬은 이미 3일 꼬박 고문을 당한 상태였다. 전신이 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다 출혈로 유산까지 했다.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 안에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 충격에 혁이는 잃었던 기억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는 실은 서울 배씨 가문의 행방불명된 후계자, 배성준이었다. 가문으로 복귀한 그는 가장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한 달 뒤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죽을 고비를 넘긴 윤이슬과 죽은 아이를 위해 사찰로 들어가 7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를 올렸다. 혼수 상태에서 막 깨어난 윤이슬은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훔쳤다. 몸이 채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무작정 사찰을 찾아갔다. 무릎이 퉁퉁 부은 채 계단을 기어오르며 그를 위해 작은 서프라이즈라도 하고 싶었다. 꼬마 승려는 그녀를 배성준이 경전을 베껴 쓰고 있는 불당 앞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낯선 웃음소리에 그녀의 걸음이 멎었다. “윤이슬? 그 여자는 그냥 호구지. 성준이가 꾸며낸 신분 하나 못 알아본 거 봤지?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잖아. 사실 지난 4년 동안은 모두 윤이슬의 이복동생, 윤희정을 위해 깔아놓은 판이었는데.” “누가 그렇게 고고한 척 굴라고 했어? 성준이가 99번이나 청혼했는데 이제 그 죗값으로 99번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고통을 똑같이 맛보게 해줘야지. 정말 웃긴 게 뭔 줄 알아? 그 99번의 운세를 누군가가 조작했다는 사실을 윤이슬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걸? 조작된 거니 액운이 나올 수밖에 없었거든. 심지어 이번 납치 사건 역시 성준이가 계획한 거잖아.” 윤이슬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며 다리가 돌덩이처럼 굳었다. 그녀는 조용히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해 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희미한 조명 아래, 사람들 사이에 한 남자가 고목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았다. 그림자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싸늘하고 잔혹했다. 윤이슬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배성준은 태연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입을 적셨다. 그리고 담담하게, 잔인한 말이 흘러나왔다. “윤이슬은 예전부터 희정이가 사생아라는 이유로 괴롭히기만 했지. 그런 악독한 여자가 어떻게 내 아내가 될 수 있겠어? 내 아이를 품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고문은 고작 3일밖에 안 당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한 달 뒤에 있을 결혼식에서 내가 더 큰 선물을 준비했거든. 그때 절망을 한 번 제대로 맛보게 해야지.” 배성준이 내뱉은 말은 차갑고 무자비했다. 마지막 한마디가 따귀처럼 윤이슬의 정신을 후려쳤다. 안에서는 폭소가 터지더니 이내 흩어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문밖 어둠 속에 숨은 윤이슬은 입술을 깨물며 버텼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제 안에는 배성준과 그의 절친만 남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친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호기심이 터져 나온 듯했다. “성준아, 윤이슬은 서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여신이잖아. 학력도 높고 능력도 출중하지. 반면 윤희정은 외모가 그럭저럭인 데다가 능력도 평범하고, 게다가 사생아잖아. 배씨 가문 후계자로서 너도 누가 네 미래 사업에 더 큰 도움이 될지 모를 리 없잖아. 그런데 왜 윤희정에게만 마음이 가는 거야?” 그 말에 배성준은 몸에 지니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보육원에서 희정이가 나를 지키려고 뱀에게 물렸거든. 그 순간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어. 희정이를 평생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말이야.” 윤이슬은 그 익숙한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거의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배성준과 그의 친구가 불당을 떠났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서 있던 윤이슬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갑자기 낮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물은 점점 더 거세게 흘러내렸다. 윤이슬은 사랑에 굶주렸기에 배성준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이 모든 건 결국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리고 거짓 속에 살고 있는 배성준이 우습기도 했다. 그때 계모 때문에 보육원으로 보내진 아이는 윤희정이 아닌 윤이슬이었다. 독사의 공격에서 배성준을 구해낸 사람 또한 윤이슬이었다. ... 폭우 속에서 윤이슬은 비틀거리며 산에서 내려왔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없이 그녀는 정신이 아득한 채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고열이 무섭게 밀려왔고 가슴이 찢어지는 절망 속에서 윤이슬은 과거를 회상하는 꿈을 꿨다. 한때 그녀에게도 행복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가정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아버지는 그녀의 교육을 위해 특별히 피아노 선생님을 고용했다. 그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며칠간 외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마주한 것은 아버지와 피아노 여교사가 거실 피아노 위에서 발가벗은 채 뒤엉켜 있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충격으로 스스로 손목을 그었고 이 끔찍한 소식을 들은 외할아버지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 당일, 아버지는 허정연이라는 피아노 교사, 그리고 윤이슬과 동갑인 사생아 윤희정을 집으로 데려왔다. 혼자였던 윤이슬은 극심한 심리적 충격으로 청력 장애와 언어 장애를 떠안게 되었다. 계모 허정연은 이를 틈타 그녀를 보육원으로 보내 버렸다. 다행히 그 보육원에는 그녀를 늘 지켜주는 오빠가 있었다. 그 오빠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윤이슬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보육원을 떠나기 전, 그 오빠는 늘 지니고 다니던 펜던트를 선물로 윤이슬에게 건넸다. 하지만 어느 날, 보육원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원장과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망했다. 윤이슬은 외할아버지가 신뢰하던 부하 덕분에 구출되었지만 큰 부상을 입었고 깨어났을 때 펜던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허정연이 몰래 가져가 윤희정에게 준 것이었다. 그 후로 윤이슬은 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 때문에 허정연의 손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그래서 나중에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배성준을 만나기 전까지, 아니, 정확히는 혁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 윤이슬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러 강원도로 떠났다. 그런데 운전 중 사고가 나면서 한 소년과 부딪히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소년은 기억을 잃었다. 원래라면 변상하고 경찰을 통해 소년의 가족을 찾아주려 했지만 현지 어르신들은 소년이 몇 년 전 혼자 떠돌아다니는 고아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부모가 없다는 점에서 윤이슬과 비슷한 불행한 처지였다. 그리고 소년의 깊고 맑은 눈동자 속에는 오직 윤이슬에 대한 의지와 신뢰만 남아 있었다. 윤이슬의 마음속에 있던 단단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년을 보살펴 주면서 ‘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소년이 앞으로 아무런 번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 후 1년 동안,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대관령 산자락을 달리며 실컷 누볐고 호숫가에서 해 지는 풍경을 수없이 쫓았다. 온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안개꽃의 낭만 때문이었을까. 혹은 뜨겁게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혁이의 애틋한 눈망울에 담긴 애정이 윤이슬의 영혼마저 집어삼킬 듯 강렬했기 때문이었을까. 술기운이 오른 그날 밤, 들판에 펼쳐진 유일한 텐트 안에서 두 사람은 가장 뜨거운 방식으로 밤새도록 하나가 되었다. 그때부터 혁이는 윤이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소녀들 앞에서 평생 윤이슬만 사랑할 거라고 선언했다. 혁이는 서툴지만 윤이슬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심지어 곰이 습격했을 때, 윤이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져 살이 찢기는 고통까지 기꺼이 감수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뼈아픈 슬픔에 무너진 윤이슬은 비로소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수하고 진실했던 소년의 사랑과 뜨거웠던 밤들은 이미 그녀의 온몸과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 버렸다. 윤이슬은 어리석게도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 모든 달콤함이 독이 든 사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4년 동안 깊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알고 보니 그녀를 지옥 불구덩이로 다시 밀어 넣은 악마였다. 심지어 뱃속에 있던 아이, 이 세상에 남은 그녀의 마지막 핏줄마저 죽여버렸다. 윤이슬이 의식을 되찾은 후, 가장 먼저 한 세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거금을 들여 최고 수준의 해커를 고용해 배성준이 한 달 뒤 공개하려던 비밀이 무엇인지 찾아내라고 했다. 둘째, 당시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의 신상 정보를 모두 찾아 달라고 했다. 셋째, 금고에 있던 권총을 집어 들고 슈퍼카를 몰아 윤희정이 SNS에 윤이슬만 볼 수 있도록 설정해 놓은 그 위치로 달려갔다. 윤희정은 배성준이 자신의 생일 파티를 위해 호텔 전체를 빌렸다며 자랑했는데 윤이슬이 이 게시물을 보고 절망에 무너지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윤이슬의 죽은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윤이슬은 이 개만도 못한 년놈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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