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시윤아, 오늘 좀 늦었지?”
나는 병상 곁에 앉아 여동생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간병인을 고용하긴 했으나 저녁이 되면 퇴근했다.
“앞으론 좀 더 일찍 와야겠어. 또 종기가 생겼네.”
이내 젖은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아주고 나서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웅크린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회사에 일찍 도착했다.
오늘 있을 회의는 전날 밤 이미 모두 통보해둔 상태였다.
임가을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너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정작 회사엔 단 하루도 나온 적이 없었다.
나는 고작 비서에 불과했으나 실제로 행사하는 권한은 거의 대표와 맞먹었다.
하지만 내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회사에선 항상 겸손하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그래봤자 일개 계약직일 뿐, 돈 받고 일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휴대폰을 진동으로 전환했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 도중 진동 음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결국 고개를 들어 임직원을 둘러보며 정중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회의실을 나와 통화 버튼을 누르자 거친 고함이 휴대폰을 뚫고 나왔다.
“정윤재! 어디야?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안 했어?”
“지금 회사에서 회의하는 중이야.”
잠깐의 정적을 끝으로 임가을이 다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렇게 가 버리면 누가 날 데려다줘? 혼자 택시 타라는 거야?”
목청이 얼마나 컸으면 고막이 터질 뻔했다.
“알았어.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도 모르게 냉소가 흘러나왔다.
어제 본 기생오라비는 단물만 쏙 빼먹고 집조차 데려다주지 않은 듯했다.
아니면 나를 꼭 괴롭혀야 속이 후련한 건가?
나는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차를 몰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슬슬 앞날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
잠시 후 어제 방을 잡았던 호텔에 도착했다.
임가을은 내려오자마자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걸어왔다.
짝! 짝!
그리고 따귀 두 대를 연신 날렸다.
작정하고 때린 탓에 금세 볼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
“개자식! 밖에서 기다리라니까 감히 도망쳐?”
나는 얼굴을 감싼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얼른 출발해.”
임가을은 조수석에 앉아 팔짱을 끼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는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고는 시동을 걸었다.
차는 도로를 빠르게 달려 임씨 저택을 향했다.
재벌가답게 대문 앞부터 웅장한 구조물이 장관을 이루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곧장 차고로 들어섰다.
임가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자질을 시작했다.
개량 한복 차림의 노인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음침한 눈빛이 나를 꿰뚫어 보듯 싶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아빠, 대체 왜 저딴 놈을 저한테 붙여준 거죠?”
임가을은 아버지 앞에서 애교를 부리며 어제 있었던 일을 한껏 과장하며 털어놓았다.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는 얘기는 감히 꺼내지 못하고, 단지 술에 취했는데 내가 자기를 내버려 두고 혼자 돌아갔다고 했다.
“네가 뭘 알아?”
나를 언급하자 임태경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너한테 윤재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어차피 곁에 둔다고 해도 우리 집 밥만 축내는 것 밖에 더 있지 않겠어요?”
임가을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아무리 딸을 끔찍이 아끼는 임태경일지언정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벌써 잊었어? 3년 전 네가 겪은 그 일 때문에 일부러 곁에 두는 거란다.”
단호한 아버지의 모습에 임가을도 더 이상 말대꾸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우리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아양 떨어봤자 널 싫어하는 건 똑같아. 이 똥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