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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감독이 대본에서 한 장면을 뽑아 들고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윤라희 씨는 옆에 계세요. 조서영 씨가 먼저 이 장면 연기해 보시죠.” 윤라희는 감독을 잠시 바라보았고 이내 말없이 옆으로 물러섰다. 조서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본을 흘끔 본 뒤 감정을 가다듬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벌써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번 장면은 여주인공이 괴롭힘을 당하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신이었다. 대사 한 줄 없는 장면으로 오로지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했다. 조서영이 한참을 흐느끼던 그때 감독이 갑자기 책상을 탁 내리쳤다. “좋아요! 감정 몰입 아주 빠르고 훌륭했어요.” 조감독과 프로듀서도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윤라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연기라고? 눈물 몇 방울 흘렸다고 감탄할 정도라면 대체 수준이 얼마나 낮아진 거야...’ 감정이라고는 없이 그저 눈물만 몇 방울 짜낸 게 전부였다. 주인공이 느끼는 비참함이나 무력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감정의 깊이나 층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울 수 있다는 건 배우의 기본기다. 하지만 그 기본기조차 제대로 익히긴 어렵다. 감정과 표정의 디테일은 물론,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함께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관객이 그 감정에 같이 울 수 있어야 ‘진짜 울음’이다. 그런데 조서영은 그냥 눈물만 짜냈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 ‘설마 저게 감정 연기라고 생각하는 건가?’ 더 황당한 건 감독이 그걸 칭찬했다는 것이었다. 윤라희는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 캐스팅은 그대로 조서영으로 확정됐다. 감독은 윤라희를 무표정하게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돌아가서 연락 기다리세요.” 주강혁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기회를 준 것일 뿐, 애초에 이 오디션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지금 윤라희를 기용했다간 언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서영은 이미 투자자가 지목한 배우였다. 그런 상황에서 윤라희와 같은 작품에 투입된다는 건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라희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뒤 감독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서영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연기를 좋아한다면 내가 기회를 줄게.’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윤라희는 이 오디션이 끝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직접 오디션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녀는 악명만 무성할 뿐, 아무런 배경도 없었다. 연결할 수 있는 건 조연급 웹드라마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현실은 더 냉혹했다. 아무리 소규모 제작이라도 윤라희를 기용하겠다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 동안 열 군데가 넘는 작은 제작사 오디션을 봤지만 전부 탈락했고 어떤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이 그녀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세상이었다. 인심의 차가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마치 2년 전, 여름의 끝자락에서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날로 돌아간 듯했다. 윤라희는 거실 바닥에 앉아 과일샐러드 한 접시를 들고 먹으며 동시에 새로운 오디션 기회를 찾기 위해 인터넷으로 이력서를 뿌렸다. 몇 군데를 보낸 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윤라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윤라희 씨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라희 씨 안녕하세요. 저는 하윤 감독이라고 합니다. 요즘 예술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주연 오디션에 관심이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윤라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주연은 꿈도 못 꿀 자리였다. 그래서 조연 쪽에만 이력서를 냈는데, 먼저 연락이 온 데다 주연이라니 의심은 됐지만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감독님, 혹시 대본을 먼저 받아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메일 주소를 알려주자 곧바로 대본이 도착했다. 윤라희는 파일을 열어보는 순간 얼굴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섹시한 새엄마가 날 사랑해? 뭐 이런 막장 같은 제목이 다 있어? 예술 영화라더니, 도대체 어느 나라 문예물이야.’ 그제야 깨달은 윤라희는 포크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졌다 해도 선정적인 저질 영화 따위에 출연할 정도로 무너진 건 아니었다. ‘뭐, 하윤 감독? 하류 감독이겠지.’ 너무 분해서 숨이 턱턱 막혔다. 분노가 가신 뒤엔 씁쓸한 체념과 허탈함이 밀려왔다. 한때는 최연소 여우주연상에, 최고의 인기와 화제성을 몰고 다녔다. 대본과 러브콜은 쏟아졌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감독들이 앞다퉈 그녀를 캐스팅하겠다며 줄까지 섰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고 누구든 함부로 짓밟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천장의 조명이 길게 뻗은 속눈썹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처럼 윤라희의 주위엔 쓸쓸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녀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다시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또다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윤라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윤라희 씨 맞으시죠? 저는 드라마 [침묵의 서약] 조감독입니다.” [침묵의 서약]은 일주일 전, 오디션을 봤던 그 대작이었다. 주연 오디션 현장에서 조서영과 마주쳤던 바로 그 작품. 그땐 이미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데, 조감독이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네, 윤라희 씨. 그날 보셨던 조연은 이미 다른 배우로 확정이 났고요. 지금은 여주인공 대역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윤라희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고 입술은 굳게 닫혔다. 과거에는 조서영이 자신의 대역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조서영의 대역 신세가 되어버렸다. 윤라희는 혀끝으로 뺨 안쪽을 눌렀고 손에 쥔 포크가 미세하게 떨렸다. “좋아요.” 그 말을 남기고 윤라희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놨다. 탕. 금속이 유리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울렸다. [침묵의 서약]의 여주인공 자리는 원래 윤라희의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대역이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되찾을 자리니까. 예상 밖의 대답에 조감독은 잠시 말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그는 사실 이 전화를 하며 거절당할 거라 확신했었다. 한때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던 배우가 그것도 과거 자신의 대역을 대신한다니 이건 거의 모욕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윤라희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히 받아들였다. “이틀 뒤에 첫 촬영입니다. 현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조감독은 한마디를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 설마 윤라희가 이 정도까지 무너질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날 저녁, [침묵의 서약]의 캐스팅 명단이 공식 발표되었다. 동시에 윤라희가 조서영의 대역으로 출연하게 됐다는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면서 실시간 검색어는 순식간에 상위권을 휩쓸었다. 윤라희는 또다시 SNS에서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다. [와, 침묵의 서약 남주가 정수혁, 여주가 조서영이라고? 내 최애 남녀 다 나와!] [조서영 진짜 수정이 역할이랑 찰떡이다. 감독님 캐스팅 대박. 원작 팬으로서 만족!] [진짜야? 윤라희가 조서영 대역이라고? 이게 말이 돼?!] [우와... 여우주연상이 자기 대역의 대역을 해준다니. 전무후무한 굴욕 ㅋㅋㅋ] [퉤, 윤라희 따위가 우리 여신님이랑 비교가 돼?] [맞아, 조서영은 노력파잖아. 밑바닥부터 올라온 진짜 실력파. 윤라희는 그저...] [조서영 진짜 불쌍해. 외모에 실력까지 다 갖췄는데, 윤라희는 그냥 스폰 하나로 모든 거 다 가져간 거잖아. 서영이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그동안 아무도 몰라줬다니... 진짜 마음 아프다.] [조서영 진짜 너무 좋아! 외모에 재능까지 완벽하고. 거문고 연주할 때는 진짜 미모 폭발이야.] [맞아요. 나도 조서영 거문고 연주 방송 봤어요. 와 진짜 소름 돋았어요! 수준급이던데, 그것도 독학으로 배웠대요. 진짜 대박.] [조서영 팬들 여기 모여요! 끝까지 우리 서영이 지켜줄 거야!] 이렇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 속에서 조서영은 홀로 휴게실 소파에 앉아 커피잔을 들고 살짝 불어가며 마시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엔 짙은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인터넷을 도배하는 저 비난의 말들이 그녀의 마음을 아주 시원하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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