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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노민준이 오전 업무를 마쳤을 때 박주경이 회사로 찾아왔다. “과일이랑 장난감 좀 사 왔어. 이따가 너랑 같이 재우를 보러 가려고.” 노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테이블 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주경은 알림음을 듣고 본능적으로 휴대전화를 봤고 메시지가 도착한 걸 보았다. [나 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오후에 같이 골프 치러 가지 않을래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홍유진이었다. 박주경은 홍유진을 알고 있었다. 홍유진은 협력사 고위 임원이었고 노민준에게 관심이 있었다. 노민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점을 이용하여 이번에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갈 거야?” “시간 없어. 그리고 만나는 건 좋지 않아. 계속 들이댄다면 적당히 받아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난 바람을 피울 생각은 없어. 그건 남자로서 할 짓이 아니니까.” 노민준과 박주경은 밖으로 나갔다. 노민준이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노민준은 잘생긴 데다가 집안 형편도 좋고 성격도 유쾌한 데다가 통도 커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박주경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실망할 여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데.” 고지수가 언급될 때마다 노민준은 굉장히 짜증이 났다. “고지수가...” 비록 말을 끝맺지는 않았지만 박주경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지수가 아이를 핑계로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노민준은 지금까지도 여자들을 실컷 만나면서 살았을 것이다. 박주경이 말했다. “너랑 고지수 씨 어떻게 된 거야?” “자기가 아이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잖아. 게다가 갑자기 사라지기나 하고 말이야. 우리 엄마가 알면 나랑 지수를 결혼시킨 걸 틀림없이 후회할 거야.” “아직 안 돌아온 거야?” “응.”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도 고지수 잘 알잖아. 내가 굳이 달래줘야겠어? 정말 날 떠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아이를 가져서 내 발목을 붙잡지도 않았겠지.” “...” 박주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노민준은 고지수에게 잘해주었다. 그때의 고지수는 밝고 활발했으며 겁이 없었다. 학교 밖에서 양아치들이 자기 반 친구를 에워싸고 있으면 고지수는 바로 달려가서 친구를 도와주었다. 그러다 도망치지 못해 하마터면 성추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때 박주경은 처음으로 노민준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양아치의 코뼈를 부러뜨린 노민준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얼굴에 멍까지 달고서 자신은 아프지 않다고 고지수를 달래주며 영웅인 척했다. 그리고 고지수가 떠난 뒤에는 몰래 보건실로 달려가서 진통제를 받았다. 그 뒤로 노민준은 고지수를 따라다니며 그녀를 지켰다. 그 탓에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남학생들은 감히 고지수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노민준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노민준의 여자 친구는 고지수의 존재를 신경 썼고 그 때문에 고지수는 일부러 노민준을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에서 고지수를 마주친 노민준은 그녀에게 왜 자신을 피하냐고 물었고 그 이유를 알더니 이튿날 바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 뒤로 노민준은 자주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을 진지하게 만나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다 고지수가 불편해하면 또 금방 상대와 헤어졌다. 예전에 노민준은 고지수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의 그는 고지수를 매우 싫어했다. “그렇게 싫으면 그냥 이혼해.” 예전이었다면 노민준은 짜증과 혐오로 가득한 표정으로 고지수가 그렇게 끈질기게 들러붙는데 이혼할 수 있겠냐며 역정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침묵했다. 노민준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서늘한 눈빛을 해 보였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내던지며 말했다.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박주경은 어리둥절했다. 노민준이 말했다. “재우 지금 병원에 있는데 돌보지도 않잖아. 나라도 재우를 돌봐야지.” 박주경은 윤혜리가 병원에서 노재우를 돌본다는 걸 알았다. 그는 병실 안 광경이 노민준이 SNS에 올린 사진처럼 아름다울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병실은 아수라장이었다. 국그릇은 바닥에 떨어져서 깨졌고 국물도 쏟아졌으며 이불도 더러워진 건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윤혜리는 노재우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는데 노재우의 팔과 배가 국물에 데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재우야, 미안해. 이모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노재우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이모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이모는 아이가 없어서 저를 잘 돌보지 못하는 것뿐이니까요... 더 빨리 닦아줄 수 있어요? 저 조금 추워요.” 박주경은 노민준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노민준은 앞으로 나서며 타월을 챙겼다. “내가 할게.” “아빠...” 속상함이 가득 느껴지는 노재우의 목소리에 박주경조차 마음이 아픈데 노민준은 오죽할까? “괜찮아. 아빠 왔어.” 윤혜리는 매우 미안했다. “죄송해요. 재우에게 국을 먹이려고 했는데 그릇이 너무 뜨거웠거든요.” 노민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국을 먹이려다가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고지수가 노재우를 돌봤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녀는 국그릇을 자신의 몸에 쏟는 한이 있더라도 노재우에게 뜨거운 국물이 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험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노민준도 경험이 없었다. 그는 노재우의 몸을 대충 닦아준 뒤 옷을 입혔다. 그러나 단추가 삐뚤빼뚤 잠겼고 바지도 제대로 입혀주지 못했다. 노재우는 바지 밑단을 밟았다가 하마터면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박주경은 모든 걸 지켜보았다. 고지수가 없다면 노재우는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없으면 이 가정도 무너질 것이다. 노민준은 윤혜리에게 돌아가라고 한 뒤 장민영을 불러 노재우를 돌보게 했고 본인은 의사를 불러 노재우의 화상을 살피게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박주경은 노민준이 언짢아하자 일부러 농담했는데 노민준은 웃지 않았다. “왜 그래? 혜리 이모 좋아했잖아. 혜리 이모 실수로 살짝 데서 이젠 혜리 이모가 싫어진 거야?” “아니에요. 저 혜리 이모 좋아해요.” 윤혜리가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해도 노재우는 그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이 모든 건 화가 나서 떠난 엄마 때문이니 말이다. 노민준은 노재우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쉬고 있어. 아빠는 퇴근한 뒤에 다시 올게.” “네.” 박주경은 노민준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노민준은 차 문을 열다가 갑자기 박주경에게 물었다. “고지수 너한테 연락한 적 없어?” “응?” 박주경은 어리둥절했다. “지수 씨가 왜 나한테 연락해?” 노민준이 올린 게시물을 봤다면 고지수는 지금쯤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번호를 차단했기에 고지수는 다른 사람을 통해 소식을 알아봐야 했고 그러기에는 박주경이 가장 적당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가 아픈데도 신경 쓰지 않다니. 앞으로는 내 앞에서 고지수 얘기는 꺼내지도 마.” 박주경은 당황했다. ‘자기가 먼저 고지수 얘기를 꺼냈잖아.’ 회사로 돌아간 노민준은 서류를 처리한 뒤 이상함을 느꼈다. 고지수는 너무도 조용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일까? 그래도 노재우의 엄마라 노민준은 고지수가 사고를 당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노민준은 심민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지수 죽었어요? 왜 아이에게 신경도 안 쓰는 거죠?] 심민지는 그 문자를 본 순간 너무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내팽개칠 뻔했다. 다행히 반사신경이 뛰어난 매니저가 그녀를 막았다. 매니저는 그녀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은 뒤 노민준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또 피 터지게 싸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노민준을 향한 심민지의 분노는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있을 수 있지? 이런 놈은 진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데.” 고지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현숙을 힐끗 본 뒤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혼 합의서 보냈어?” “아니.” “그러면 내가 돌아간 뒤에 해결할게. 괜히 싸우지 마. 나 지금 현숙 이모랑 같이 전시회 보고 있어서 다음에 연락할게.” “그래.” 고지수는 전화를 끊은 뒤 유현숙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수야, 이혼하려고?” 유현숙은 그녀의 통화 내용을 들은 듯했다. 고지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현숙은 더 묻지 않았다. 유현숙은 그동안 쭉 해외에 거주했고 고지수는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었다. 고지수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둘은 연락이 뜸해졌는데 이번에 고지수가 와줘서 유현숙은 진심으로 기뻤다. 그러나 정작 고지수를 만났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기억하는 고지수는 순진무구하고 활력 넘치며 배려심이 많은 아이였는데 지금의 고지수는 마치 모서리가 전부 닳아버린 것 같았다. 결혼 생활이 그녀를 이렇게나 많이 바꾸었으니 유현숙은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친구 진우정에게 자식은 고지수 한 명뿐이었다. 유현숙은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여 노민준을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래서 고지수가 이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폭죽을 터뜨리며 축하해주고 싶었다. 유현숙 본인도 이혼했었다. 스물에 결혼하여 서른에 이혼한 유현숙은 재산의 반을 나눠 가진 뒤 덴보크에서 살았고, 누구를 만나든 어떻게 살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즐겼다. “아이는? 누가 키울 거야?” “아이 아빠가 키울 거예요.” “잘됐네.” 유현숙의 아이도 전남편이 키웠다. “혼자 살면 편해. 지난번에 네가 줬던 사진들 여기 걸어놨는데 한번 가볼래? 올해 내 생일이라 내 아들도 왔거든. 나는 내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네.” 유현숙이 떠났다. 고지수는 이내 자신이 유현숙에게 선물해 주었던 사진을 찾게 되었다. 그 사진 앞에는 키 큰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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