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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생일 파티가 끝난 뒤 고지수는 가정부를 도와 청소하고는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들고 위층에 있는 유현숙을 찾으러 갔다. 문 앞에선 고지수는 살짝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유현숙의 흐느낌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심동하의 뒷모습을 보았다. 두 모자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에 유현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는 우정이 유일한 딸이야. 그때 내 사업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았어도 나는 지수를 이곳으로 데려왔을 거야. 그랬다면 노민준 그놈이랑 결혼할 리도 없었겠지. 그동안 지수가 어떤 나날을 보냈을지... 지수가 얘기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 성격이 저렇게 많이 변했으니 말이야. 길을 걷다가 마주쳤다면 아마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야. 걔 부모님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눈에 선한데 내가 좀 편 들어준 게 뭐 어때서?” 문 앞에 서 있던 고지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사실 지수를 입양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전미주 그 여자가 그딴 식으로 말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게다가 난 거짓말은 안 했다고.”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심동하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너 어렸을 때 지수 엄청 좋아했었어!” 심동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어릴 적 얘기를...’ “너희 둘 헤어지게 됐을 때 우정이가 지수한테 너랑 계속 같이 있으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수가 우정이 신분증을 챙기자마자 네가 지수를 데리고 갔었어.” 근거 있는 말이었다. “맞잖아. 내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 “오늘 지수 만났어?” “아니요.” 유현숙의 목청이 커졌다.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지수에게도 문제가 있을 거라고 한 거야? 너희 둘 내년에 결혼할 거란 말은 내가 한 거야. 그래야 사람들이 너희들이 결혼할 거라는 걸 철석같이 믿고 지수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지수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 나라도 지켜줘야 해. 네가 뭘 할 필요는 없어. 연기할 필요도 없어. 그냥 지수가 이혼할 때까지만 부정하지 말아 줘. 지수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면 내가 지수를 데려와서 내 딸처럼 키울 거야. 명안의 대표인 네게 헛소문을 잠재우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리고 만약 그 사이에 네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엄마가 직접 찾아가서 너 대신 설명할게.” 유현숙은 이 정도면 만족하냐는 어투로 말했고, 심동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심동하가 8살 때 그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심동하는 아빠와 함께 살았고 유현숙은 덴보크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동안 귀국한 적이 매우 드물어서 모자 관계가 늘 서먹서먹했다. 그런데 이번에 유현숙이 이렇게 놀라운 일을 벌였을 줄은 몰랐다. 심동하는 고지수를 본 적이 없지만 유현숙이 노민준을 언급했을 때 고지수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날 백화점에서 고지수와 그녀의 친구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고지수는 속물인 데다가 야망도 크며 수완도 꽤 좋은 사람인 듯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지.’ 심동하가 남자 쪽만 잘못했을 리가 없다고, 고지수에게도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고 했을 때 유현숙은 그녀를 편들었고, 심동하는 유현숙이 고지수에게 완전히 속았다고 생각했다. ‘고지수.’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데 능숙한 그녀의 교활한 본모습을 유현숙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3개월 만이에요. 그동안은 부정하지 않을게요.”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혼할 수 있겠죠.” 그리고 고지수도 그사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심동하가 떠나려고 하자 유현숙이 만류했다. “잠깐.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 “그럴 필요 없어요.” 심동하가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지수는 유현숙이 자신을 위해 아들을 강요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유현숙이 본인 때문에 아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고지수는 유현숙을 설득할 생각이었으나 이미 아들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한 유현숙은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너도 걔가 싫겠지. 나도 알아. 괜히 만날 필요는 없어. 그냥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지내. 만약 걔가 뭐라고 한다면 그냥 참으라고 해. 3개월 금방 지나가.” “싫은 건 아니에요.” 만약 그녀였다고 해도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유현숙은 고지수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지수야, 아무도 네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이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노민준은 온갖 방법으로 재산을 빼돌릴 수가 있고 시간을 질질 끌어 고지수가 한 푼도 얻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너 설마 아무것도 안 받고 이혼할 생각이야?” 고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감사해요, 이모. 저 최대한 빨리 이혼할게요. 그래야 심 대표님도 편해지고 이모도 곤란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괜찮아. 넌 그냥 너만 생각하면 돼.” 고지수는 감동했다. “네.” 그 뒤 유현숙의 설득으로 고지수는 그곳에 이틀 동안 더 머물렀다. 돌아가는 티켓은 유현숙이 사주었다. 비즈니스석인 데다가 유현숙은 직접 그녀를 공항까지 바래다 주기까지 했다. 비행기에 탑승한 고지수는 뜻밖에도 심동하를 발견했다. 그들은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날 문밖에서 들었던 말이 고지수의 귓가에 다시 울려 퍼졌다. 고지수는 머쓱해서 안절부절못했지만 그러다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심동하가 매우 쌀쌀맞았기 때문이다. 헤드폰을 낀 그는 도도하고 냉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고지수는 심동하가 자신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그의 주변에 그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걸 이내 발견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앞에서 한 아이가 장난을 치면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러다 이따금 소리를 지르면 아이 엄마가 황급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아이를 혼쭐냈다. 노재우가 떠오른 고지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기내 와이파이에 연결한 뒤 심미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심미진에게는 비어 있는 집이 여러 개 있었는데 고지수는 당분간 그녀의 집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심미진은 고지수에게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내더니 자신과 함께 지내자고, 자신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했고 고지수는 웃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통로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안색이 파리해졌고 아이 엄마는 곧바로 이상함을 눈치챘다. “진아, 왜 그래? 스튜어디스! 스튜어디스! 도와주세요!” 스튜어디스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아이 엄마가 너무 다급해하는 바람에 소통이 더 어려워졌다. 비즈니스석 승객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고지수는 아이 엄마의 말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사탕이 아이 목에 걸린 듯했다. 고지수는 곧바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해볼게요. 응급 처치를 배운 적이 있거든요.” 아이 엄마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간절한 얼굴로 고지수를 붙잡았다. “어서 제 아이를 구해주세요!” 고지수는 아이를 뒤에서 안으면서 복부를 강하게 눌렀고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사탕이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와 선반에 부딪쳤다. 아이는 심하게 기침했고 고지수는 아이가 편히 숨을 쉴 수 있도록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아이는 숨을 조금 고르더니 이내 무서움에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도 눈물을 쏟으면서 아이를 안은 채로 고지수를 향해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고지수는 아이 엄마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달랬다. 고지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응급 처치를 배운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앞으로 사진을 촬영하러 다니다 보면 갑자기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황에서 본인 또는 동료를 구하려고 일부러 응급 처치를 배웠었다. 결혼한 뒤에는 노재우에게 두 번 사용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노재우의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렸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노재우가 수영장에 빠져서 물을 많이 삼켰을 때였다. 그때 고지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잘 달래주세요. 혹시나 울다가 또 기도가 막히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병원에 한 번 가보세요. 사탕이 기도에 상처를 냈을 수도 있으니까요.” “네, 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고지수는 싱긋 웃다가 심동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주 그윽하고 파문 하나 일지 않는 평온한 눈빛이었다. 고지수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심동하는 언제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심동하의 헤드폰에서 권예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내가 얘기하잖아. 안 들려?” 심동하는 마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지수에게 물었다. “Rita 씨인가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전시회장에서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방금 그녀를 알아본 것일까? “네.” 심동하는 주머니 안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심동하라고 합니다.” 고지수는 그의 명함을 받았다. “저는 Rita 씨 사진이 마음에 들어요. Rita 씨가 우리 회사 제품 홍보용 사진을 찍어줬으면 좋겠어요. 가격은 협의 가능하니 한 번 고민해 보세요.” 명함 위에 적힌 명안이라는 두 글자에 고지수는 마음이 흔들렸다. 만약 명안과 협력할 수 있다면 앞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다. 헤드폰에서 권예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동하,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고지수가 대답하려는데 심동하가 시선을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권예준이 말했다. “고지수 그 여자 생긴 건 꽤 예쁘더라. 거의 연예인급이던데? 사진 찾았는데 보내줄까?” “관심 없어.” “그 여자가 너한테 관심이 있다면? 게다가 그 여자는 네 엄마 마음에도 들었잖아. 네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심동하는 어머니가 이틀 전 보내줬던 전화번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 연락처를 사용하여 고지수의 카톡을 추가했다. “꺼지라고 할 거야.” “헐, 너무 매정하다.” 심동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추가 버튼을 눌렀고 다음 순간 옆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고개를 돌린 심동하는 Rita의 약지에 반지를 꼈던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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