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여수민은 남민우의 안쓰러운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머릿속에 스치는 남민우의 다른 여자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여수민은 침묵을 일관했다. 남민우는 침묵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고, 감정이 북받쳐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여수민을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진서하를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흔들렸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그저 어리석은 허영심이었을 뿐이야. 좋아서나 사랑해서가 절대 아니라고. 내가 정말 다른 여자를 볼 마음이 있었다면 어릴 적부터 너 하나만 바라보며 네가 커 주길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야. 대학원 때까지 내 주위에 다른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너는 잘 알잖아.” “난 아직도 너만 사랑해. 너만 원해. 너와 헤어지는 건 죽으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야. 제발 수민아 한 번만 나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직접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말을 들은 여수민은 고통스럽거나 슬프기보다는 그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남민우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거리를 두었고, 손으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단 한 순간이라도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는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에게는 차라리 죽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운 여수민이었지만 사실 그녀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고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민우의 어깨는 순간 무력하게 축 처졌다. 순간 남민우는 여수민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남민우는 갓 중학교에 입학한 참이었다. 농구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그는 문 앞 복도에 서 있는 여수민을 보았다. 그녀는 손에 여러 장의 고지서를 들고 무거운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여수민의 양부모가 싸우고 있었다. “말도 못 하는 애가 무슨 공부를 한다고 그래? 이렇게 매일 돈만 달라고 할 줄 알았더라면 수민이를 보육원에서 데려오지도 않았어! 우리 아들 학원비도 만만치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