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강청서는 뜻밖에도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자 난처한 기색으로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서화는 여인들 사이에서는 꽤 괜찮은 편이었지만 오늘 연회에는 오라버니처럼 오랫동안 글과 그림을 익힌 문인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감히 자신의 부족한 그림 솜씨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거절하려는 찰나, 강희천이 먼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여인의 글과 그림은 함부로 남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인의 서재에 마침 반쯤 남은 고문서 하나가 있어 함께 감상하실 분을 찾고 있는데 대군께서 원하신다면 이따 내기에서 이기신 후에 제 서재로 들르시지요.”
초대하는 말투였지만 표정은 몹시 싸늘했다. 마치 섭정왕이 응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이현익은 강희천의 눈빛에 담긴 위협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빛냈다.
강씨 저택에는 서재가 하나뿐이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모두 그곳에서 할 터였다. 그러니 강희천의 서재에 가는 것이나 강청서의 서재에 가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흔쾌히 승낙하며 말했다.
“강 선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내가 그리 따르겠소.”
그리고 강희천의 분노에 찬 눈빛은 무시한 채 술 동이를 바라보며 다시 술 석 잔을 따라 단숨에 마셨다.
이어 빈 잔을 김정혁에게 보이며 눈빛에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김 도령, 자! 드시오...”
김정혁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현익이 강청서의 필묵을 원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강희천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자 그 불길한 예감은 확신과 분노로 바뀌었다.
그 귀하신 섭정왕께서 어찌 한가로이 한낱 선비의 집안 잔치에 오셨나 했더니, 결국 그 선비의 누이를 흠모하여 그를 처남으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귀하신 분이 청서를 데려가서 뭐 하려고? 첩으로 들이려는 건가, 아니면 측실로 삼으려는 건가. 게다가 며칠 전 궁에서 교지를 내려 조카딸을 이현익에게 측실로 내리지 않았는가?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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