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네?”
서하영은 잠시 놀라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안 웃었어요!”
임도윤은 긴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무서워요? 그쪽은 주미 친구고 주현이 가정교사니까 똑같이 날 삼촌이라고 불러도 돼요. 난 아랫사람에게 늘 너그럽고 다정해요.”
서하영은 더 웃고 싶었지만 애써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임도윤은 긴 눈매로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한소윤 또 만나면 그냥 무시해요.”
서하영은 억울했다.
“그 여자가 내 앞을 막았어요.”
“사람 잘 차잖아요.”
서하영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한소윤 차도 돼요?”
임도윤의 목소리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이죠. 실컷 차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처리한다고?’
서하영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웠다. 이 한마디로 그의 행동 스타일이 드러난 셈이었다.
임도윤은 서하영이 괜한 생각을 할까 봐 한 마디 덧붙였다.
“나 때문에 그쪽 귀찮게 구는 거니까 내가 해결해야죠.”
서하영은 남자의 턱선이 뚜렷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가?’
차 안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임도윤은 얇은 입술을 살짝 열며 말했다.
“얼마 줄까요?”
서하영은 당황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미 한소윤에게 임도윤보다 돈을 더 줄 수 있는지 물었기에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미 말로는 수업 한 시간에 20만원이래요. 임도윤 씨가 월급 주는 거라면 저한테 매달 160만원을 줘야겠죠.”
임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200억은 꽤 합리적인 금액이네요.”
임주현이 대학에 갈 때까지 가르쳐도 200억을 벌 수는 없을 테니까.
서하영은 실망스러운 듯 웃었다.
“아쉽네요.”
남자가 물었다.
“뭐가 아쉽다는 거죠?”
“한소윤 씨가 돈 안 줘서요.”
“...”
임도윤은 서하영이 200억보다 가치가 없다고 그를 조롱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역시나 앙심을 품고 독한 말을 뱉는 아가씨라 그를 놀릴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서하영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기분이 이상하게도 좋았다.
...
월요일, 강진 대학교 정문 앞은 차량과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이바흐 차 안에서 한소윤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차 밖을 바라보더니 서하영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옆에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저 여자야. 서하영, 강진 대학 경제학부 3학년.”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한소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한눈에 그녀를 발견했다.
심플한 흰색 셔츠, 연청색 데님 팬츠는 바지 끝이 살짝 접혀 있었고 발에는 흰색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깔끔한 분위기 때문에 눈길이 갔다. 한눈에 봐도 순수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놀랄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여자를 만나본 심민우는 단지 차갑게 웃기만 했다.
“아침에 중요한 회의도 있는 월요일에 굳이 여자 하나 보라고 불러낸 거야?”
한소윤은 말 돌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여자를 꼬셔. 심씨 가문 주식 두 점 포기할게.”
한소윤은 심민우 고모의 딸로 심씨 가문 어르신 심중건이 백 년 후 두 점의 주식을 외손녀 한소윤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단 두 점이지만 수백억이었다.
심민우의 잘생긴 얼굴에 비로소 놀라움이 스쳤고 다시 그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경멸하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 여자가 그만한 가치가 있어?”
정교하게 화장한 한소윤의 표정은 단호했다.
“할 거야 말 거야?”
심민우는 입술을 비틀며 악랄하게 웃었다.
“당연히 하지. 미인과 돈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어디서 찾겠어?”
한소윤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
심민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길어서 3일 안에 내가 침대로 데려간다.”
한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때 사진 보내주면 내가 주식 포기 계약서에 서명할게.”
“오케이!”
...
정유나는 일이 있어 아침 수업을 마친 뒤 떠났고 점심에 서하영은 혼자 밥 먹으러 갔다.
강진 대학교 동문 밖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거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골목에 있는 면 가게는 정통적인 맛으로 유명했다. 서하영과 정유나는 이곳의 단골이었다.
서하영은 혼자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골목 입구에서 몇 명의 여자들에게 가로막혔다.
데님 차림의 여자가 맨 앞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서하영을 노려보았다.
“민정 언니 아직 입원 중인데 이대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어?”
서하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여자가 차갑게 말했다.
“민정 언니 병실에 찾아가서 네 뺨 때리며 사과해. 언니가 화 풀면 우리도 더 따지지 않을게.”
서하영이 여자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안 가면?”
“글쎄.”
뒤에 있던 여자가 손에 야구 방망이를 든 채 걸어 나와 서하영을 위협적으로 바라보았다.
서하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주민정과 사이가 그렇게 좋으면 너희들도 같이 병원에 입원시켜 줄까?”
“이게 죽고 싶나!”
야구 방망이를 든 여자는 악랄한 표정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서하영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서하영이 발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서 팔이 나타나 방망이를 잡았다. 연한 파란색 셔츠 사이로 드러난 손목은 여자의 살결처럼 하얗게 빛났다.
동시에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럿이 한 사람 괴롭히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서하영이 고개를 돌리자 옆에 나타난 남자는 최소 185가 넘는 키에 피부는 여자보다 더 하얗고 여우 같은 눈매가 살짝 휘어진 채 붉은 입술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악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말을 마친 남자가 잡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힘껏 휘두르며 차갑게 한 마디를 뱉었다.
“꺼져!”
몇 명의 여자들은 제일 먼저 남자의 미모에 놀랐다가 친구가 비틀거리자 표정이 확 바뀌었다. 데님 옷을 입은 여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고 흰 얼굴에는 냉혹함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
“남의 일에 관심은 없지만 이 여자 일이면 말이 다르지.”
데님 옷을 입은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무슨 사이인데?”
남자는 서하영 앞에 서서 그녀를 보호하며 고개를 돌려 서하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 여자 친구야.”
남자를 바라보는 서하영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차분했다. 샘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듯했지만 동시에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맞은편 몇 명의 여자들은 남자의 기세와 명품으로 치장한 옷차림을 보고 그의 신분을 알 수 없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가 내 친구 다리를 부러뜨렸으니까 반드시 사과해야 해!”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친구?”
여자는 즉시 오만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주민정. 걔 아빠가 회장이야.”
남자는 문득 경멸과 조롱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난 또 누군가 했네. 내 여자 친구가 주건형 딸에게 사과하면 주건형이 놀라서 자빠질 것 같은데?”
여자들은 당황했고 야구 방망이를 든 여자가 데님을 입은 여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했다. 데님을 입은 여자는 놀라며 서하영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곧 놀라워하던 눈빛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고 이내 서하영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서하영이 지선우를 거부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게.”
데님을 입은 여자는 한풀 꺾인 기세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뒤에 있던 몇몇 여자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서하영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여자 일행이 멀어지자 남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진심 어린 말을 전하고 이내 학교로 돌아가려는데, 남자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여자의 예쁘장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웃었다.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한마디로 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