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당신은 악마야!”
저주 어린 외침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악마라면...”
이내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그녀에게 바싹 다가갔다.
“넌 내 아내라는 거 잊지 마.”
그들은 부부였다.
악마의 아내가 어찌 마냥 결백할 수만 있겠는가.
손아윤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문밖에서 떠나지 않고 방 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장은심의 기척을 살폈다.
“대표님, 지유 아가씨께서...”
장은심이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제 발로 갈래, 아니면 내가 안아서 데려가 줄까?”
최주원이 묻는 동시에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 했다.
손아윤은 몸을 비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결벽증이 있어서, 그냥 휠체어 탈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은심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포착했다.
‘참으로 충직한 개구먼.’
최주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끝으로 볼 안쪽을 쓸었다.
그러고는 문가에 서 있는 장은심을 향해 외쳤다.
“거기서 넋 놓고 뭐 하세요? 당장 휠체어 가져오지 않고.”
장은심은 흠칫 놀라더니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저, 저요?”
그녀는 최지유 전담이었기에 단 한 번도 손아윤의 시중든 적이 없었다.
“여기 아주머니 말고 누가 더 있어요?”
장은심의 굼뜬 반응이 못마땅한 듯 최주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유 앞에서도 일을 그렇게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장은심은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했지만, 최주원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최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사람이고 물건이고 가릴 것 없이 유별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던 최주원이었다.
그런데 오늘 자기 때문에 난 화를 엉뚱하게 도우미에게 쏟아붓다니, 참으로 신선한 광경이었다.
상황 파악 못 한 사람이 봤다면 아내를 끔찍이 아끼는 남편인 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밖에 경호원도 깔렸는데, 굳이 나이 든 도우미한테 화풀이할 것까지야. 나중에 최지유 찾아가서 오늘 일 다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여자가 샘나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게 두렵지도 않아요?”
손아윤의 말투에는 조소가 가득 묻어났다.
“이따가 지유 만나면 입 조심해.”
최주원은 도우미가 고자질하는 것보다 손아윤의 입에서 나올 독설이 최지유에게 끼칠 영향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이때, 회진을 돌던 간호사가 다가와 제지했다.
“병실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안 됩니다.”
최주원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간호사가 수액병을 뜯으려 하자 손아윤이 말을 건넸다.
“링거 나중에 맞으면 안 될까요? 지금 나가봐야 해서요.”
“환자분 지금 몸이 많이 허약한 상태라 영양을 보충하지 않으면 저혈당으로 쓰러질 수도 있어요.”
간호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 발치에 서 있는 남자를 못마땅한 눈길로 훑었다.
“주치의 선생님께 아내분 상태에 대해 못 들으셨나요?”
최주원의 머릿속에 의사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재생불량성 빈혈입니다.’
“휠체어 타고 나가면 링거 맞는 데 지장 없죠?”
마침 장은심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며 통화 중인 휴대폰을 최주원에게 건넸다.
“대표님, 지유 아가씨 전화입니다.”
그는 손아윤의 손등으로 천천히 삽입되는 바늘을 힐끗 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치고는 휴대폰을 돌려준 다음 직접 휠체어를 끌고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간호사가 손아윤을 부축해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수액병을 거치대에 걸었다.
최지유의 병실은 두 층 위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 최주원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화면 위로 ‘최지유’라는 이름이 얼핏 보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콰당.
병실 안에서 무거운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주원은 휠체어에 탄 손아윤을 앞질러 성큼성큼 병실로 달려갔다.
“내가 금방 간다고 했잖아!”
손아윤이 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최지유는 최주원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최주원은 그녀를 바닥에서 조심조심 들어 올렸다.
발치에는 옆으로 쓰러진 휠체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최주원이 마치 유리 인형을 다루듯 최지유를 병상에 앉혔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붙여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최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달콤하면서도 힘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사이를 오해한 백다인 씨한테 제대로 설명도 못 해줬는데 그런 사고가 나버리니까 새언니가 오빠를 원망하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됐어요. 전화로 금방 온다더니 5분이 지나도 안 오길래, 내가 직접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려다가 그만...”
병실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윤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오해라니?
그녀는 백다인이 죽기 전에 보냈던 영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주원의 품에 안겨 애틋한 키스를 나누던 최지유.
몰래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이미 불이 붙은 두 사람은 이성 따위 던져버리고 끝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당시 영상을 클라우드에 백업해두지 않은 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나중에 최주원이 붙여둔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휴대폰을 뺏고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지금 그 영상만 확보해도 최주원을 한 번쯤은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손아윤이 회상에 잠긴 사이, 장은심은 그녀가 탄 휠체어를 밀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나 보러 와준 거예요? 너무 기뻐요!”
최지유 특유의 달콤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손아윤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살아있으니 기쁘기도 하겠지.”
“손아윤!”
최주원이 눈을 내리깔고 근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손아윤은 화가 난 그의 모습을 가뿐히 무시하고 정색하며 말했다.
“남의 골수를 기증받아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처지인데, 안색은 어느 건강한 사람보다도 좋으니 당연히 기쁘지 않겠어요?”
“전...”
최지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식적인 미소를 되찾았다.
“언니 말이 맞아요. 당연히 기뻐해야죠. 이게 다 주원 오빠 덕분이에요. 오빠가 동분서주하면서 최고의 의료진도 붙여주고, 식단 관리해 줄 영양사까지 직접 고용했거든요. 다만 주원 오빠가 나 때문에 너무 마음을 쓰는 것 같아 혹시라도 새언니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해서...”
손아윤은 최지유의 가증스럽고 무해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 조만간 네 오빠가 너한테 신경 쓸 일은 아예 없을 테니까.”
순간, 최지유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최주원의 손을 살짝 끌어당기며 물었다.
“오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최주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싸늘한 표정의 손아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말 안 했나 보네요? 당신이 골수 기증자를 이미 찾았다는 거.”
그 말에 최지유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오빠, 사실이에요?”
“한 달 정도 지나면 골수 이식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최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증자는 누구예요?”
최지유는 그의 소매 끝을 붙잡고 애교 섞인 말투로 물었다.
“기증자 정보는 비밀이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네 몸이 회복되면 그때 나랑 같이 찾아가서 감사 인사라도 드릴 수 있게 할게.”
“하지만... 잘못되기라도 하면요?”
최지유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전 그분을 영영 만날 기회조차 없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수술은 무조건 성공할 거야.”
최주원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자신감을 가져야지.”
손아윤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애틋한’ 연극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녀가 최씨 가문 본가에 갇혀 지낸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최주원은 최지유에게 맞는 골수 기증자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6개월 전에도 기증자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상대방은 대가로 20억을 요구했다.
물론 그에게는 통장 잔액의 소수점 자리에 불과할 만큼 하찮은 금액이었다.
최주원은 흔쾌히 수락했고, 곧바로 최지유의 수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막판에 기증자가 에이즈에 걸린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게 희망은 다시 한번 처참히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