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무용 대회 전날, 지연우는 10여 명의 건달에게 끌려 골목으로 사라졌다. 구조되었을 때는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검사 결과, 두 다리는 심하게 뒤틀려 기형이 되었고 왼쪽 귀는 듣지 못하게 되었으며 평생 소변 주머니도 달고 살아야 해서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그녀를 가장 아껴오던 오빠는 노발대발하며 반드시 건달들을 응징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녀를 애지중지하던 약혼자는 가슴 아파하며 세계 최고의 의료팀을 불러 치료에 나섰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지연우는 휠체어를 밀고 계단 모퉁이를 지나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미쳤어? 그냥 대회만 놓치게 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연우는 평생 소변 주머니를 달고 살게 생겼어!”
이 목소리는 약혼자 하정현이었다.
지연우가 대회만 놓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곧이어 담배 연기 사이로 오빠 지승호의 음성이 흘러왔다.
“건달들이 선을 넘기는 했지만 결과는 괜찮잖아? 이번 우승자는 무조건 유림이어야 해.”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연우는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어. 나는 친오빠로서, 너는 약혼자로서 지켜 줬지. 지금껏 모자람 없이 자랐으니까 장애인이 되어도 굶을 일은 없어. 근데 유림이는 달라. 유림이는 양녀라 어릴 때부터 뭐든 조심스러워했어. 유림이가 바라는 건 대회 우승밖에 없는데, 연우가 너무 뛰어나서 걸림돌이 돼. 그 애가 의지할 사람은 나뿐이야. 누구도 유림이 길을 막게 놔둘 수 없어.”
“정현아, 우리는 친구야. 친구는 손발이고, 여자는 옷일 뿐이라고. 너 연우를 좋아하는 거 알아. 둘이 결혼까지 약속한 거 알겠는데, 연우 때문에 유림이 일 망설이지 않겠다고 나랑 먼저 약속했잖아.”
하정현은 한참 침묵하다가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했다.
“알았어. 연우가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있어. 의사한테 최상급 진통제를 쓰라고 전해줘.”
두 사람은 담배를 비벼 끄고 멀어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쑥대밭처럼 고요해졌고, 지연우는 자기 심장이 갈라지는 소리만 들었다.
그날 골목길에서 건달이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닌 치밀하게 꾸며진 함정이었다. 그리고 칼을 쥔 사람은 그녀가 가장 신뢰한 두 사람이었다.
지연우는 입을 벌렸다. 그녀는 소리 지르며 울고 싶었다.
하지만 비통과 절망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새끼 고양이 같은 신음만 새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연우는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끔찍한 일을 겪었어도 오빠가 있고, 약혼자가 있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는 두 남자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아버렸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 망가진 몸, 산산조각 난 심장이 다 그들 때문이라는 것을...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가렸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몸은 금방이라도 죽을 듯 아팠다. 왜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때 지씨 가문에서 가장 사랑받는 딸이었다.
오빠 지승호는 애지중지하며 혼내는 말 한 번 하지 않았다. 약혼자 하정현은 어릴 때부터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공언했다.
지연우는 온실 속 장미처럼 귀하고 순진했다. 세상의 풍파 따위가 자신을 스치지도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 14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외동딸 강유림을 집으로 데려왔다. 마른 몸에 색 바랜 원피스를 입은 강유림은 거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때 지연우는 멍청하게도 가장 아끼는 머리핀을 그녀의 머리에 꽂아 줬다. 마냥 불쌍해 보이는 동생이 앞으로 자신의 가장 큰 재앙이 될 줄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이었다. 강유림이 어머니의 꽃병을 깨뜨리고는 눈물 글썽이며 그녀가 던졌다고 했고, 그녀의 대회 참가증을 잃어버려 놓고는 실수였다며 징징댔다.
매번 지승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나무랐고, 하정현도 관자놀이를 누르며 강유림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 양보하라고 했다.
그리고 일은 점점 터무니없어졌다.
3달 밤새 준비한 대회의 수상자 명단에는 강유림의 이름이 적혔다.
죽어라 연습해 얻어 낸 솔로 무대에도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강유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공기가 빠져나가는 유리병 같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눈앞에서 하나씩 강유림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우스운 건, 그녀가 정말 자신이 부족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야 희미하게 깨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소중히 여긴 모든 것은, 가장 믿은 두 사람이 직접 강유림에게 바쳐 온 것이었다.
그녀의 뛰어남은 잘못이고, 재능은 죄였다.
그녀 자체가 강유림의 길을 닦아 주는 디딤돌이었다.
하지만 하정현은 그녀의 약혼자, 지승호는 친오빠다. 그들이 떠받드는 강유림은 겨우 양녀일 뿐이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이 그녀의 유일한 의지였지만 이제는 그들의 손으로 그녀를 파괴했다.
지연우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렇게 변해 버린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휠체어를 밀며 결심했다. 그대로 굴러떨어져 끝내자고 말이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낯선 번호가 떴다.
한참을 울리게 두다가 결국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연우 씨.”
전화기 너머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Nova 연구소에서 연락드립니다.”
“무슨 일이죠?”
“지연우 씨가 겪은 불의의 사고에 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희 연구소 신약 테스트 참가자가 되어 줄 의향이 있나요?”
지연우는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 또다시 눈물이 터졌다.
“제 처지가 얼마나 더 비참해져야 할까요?”
“저희의 신약은 지연우 씨에게 새 삶을 줄 수도 있습니다.”
“뭐라고요?”
“부러진 뼈를 다시 붙이고, 청력을 회복시키고, 심지어...”
그는 금방 말을 보탰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지연우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왜냐하면...”
잠시 침묵한 그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완전히 파괴된 사람만이 불사조처럼 되살아날 자격이 있으니까요.”
지연우의 몸이 굳어 휠체어를 밀던 손이 완전히 멈췄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눈 부신 햇살 아래 눈물이 흘렀다.
잠시 후, 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좋아요, 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