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강유진이 송하준의 화를 진정시키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가 곧바로 송하준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하재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청강으로 와.”
늘 그랬듯 명령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유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청강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강유진이 가는 이유는 하재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카이로스와 송하준 때문이었다.
카이로스는 그녀가 직접 선택한 프로젝트였다.
초기 단계에서 많은 공을 들였고 몇 차례나 송하준을 찾아가 제안서를 조정하며 설득한 끝에 성사한 일이었다.
결국 이대로 모든 걸 물거품으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강으로 가려면 김성민에게 약속한 진료를 미뤄야 했고 당연히 혼나야 하는 상황도 감수해야 했다.
강유진이 이번 일만 끝나면 반드시 몸조리를 제대로 하겠다고 다짐해서야 김성민은 화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깊은 밤, 폭우가 쏟아지는 청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급히 온 탓에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아랫배가 은근히 욱신거리며 불편했다.
겨우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강유진은 미리 하재호와 카이로스 관련 논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송하준과 만났을 때 의견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두 번째 미팅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강유진은 비에 젖은 머리를 닦을 겨를도 없이 하재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기 너머에서 노윤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호야, 강 비서님 전화 왔어.”
이어서 하재호의 말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고 노윤서가 그의 말을 전해 주었다.
“강 비서님, 재호가 샤워 중이래요. 조금 있다가 다시 거는 게 어떨까요?”
강유진은 숨이 턱 막혀왔다.
“별일 아니니 하 대표님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강유진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호텔방에 남녀가 함께라... 분위기 좋겠네.’
강유진은 피식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창가에 서 있던 강유진은 몸속 깊숙이 찬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청강은 강성보다 훨씬 쌀쌀했다.
아랫배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가보니 생리통 때문이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평소보다 거의 일주일이나 앞당겨졌고 통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강유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호텔 프론트에 진통제와 위생용품을 요청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직원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강유진 씨, 병원에 안 가봐도 괜찮으시겠어요?”
강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진통제를 먹으면 좀 나아질 거예요.”
직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재삼 당부했다.
“혹시 불편하시면 언제든 프론트에 전화해요.”
“네, 알겠어요.”
대답은 했지만 강유진은 그 밤을 홀로 이겨냈다.
다음 날 아침, 얼굴색이 눈에 띄게 좋지 않았고 화장해도 별로 나아 보이지 않았다.
강유진은 마음속으로 하재호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직원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일하는 모습이었다.
위약을 먹으려면 아침을 챙겨야 했기에 강유진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녀가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 마침 하재호와 노윤서가 막 식사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노윤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 비서님, 이제 일어나셨나요? 음식이 별로 남은 게 없어요.”
강유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금 늦었네요.”
하재호는 강유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밖을 한 번 살핀 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윤서를 향해 말했다.
“밖에 비와. 기온도 더 내려갈 것 같은데 외투 하나 챙기자.”
“그래.”
노윤서는 강유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뒤 하재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하재호가 저렇게 세심한 남자였어?’
다정다감한 그의 모습을 처음 본 강유진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레스토랑 안은 노윤서의 말대로 거의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강유진은 대충 빵 두 개를 집어 간단히 아침을 때우려 했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하재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강유진이 전화를 받자 아까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나와.”
“지금요?”
강유진은 손에 든 빵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왜? 우리가 너를 기다려야 해?”
잠시 침묵 후 강유진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빵을 가방에 넣고 서둘러 호텔 밖으로 나섰다.
하재호와 노윤서는 이미 나란히 뒷좌석에 타 있었다.
강유진은 눈길을 살짝 내리깔며 눈빛 속 생각을 감춘 채 조수석에 앉았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하재호는 기다림에 지친 듯 운전기사에게 빨리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빵이 아직 따뜻했지만 강유진은 결국 꺼내지도 못했다.
하재호는 차 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싫어했다.
7년 동안 그의 비서로 일하며 강유진은 하재호의 취향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고 본능처럼 그에게 모든 걸 맞추고 있었다.
속이 불편해 빵을 조금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하재호는 그런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전에 카이로스와 어떻게 논의한 거야?”
하재호의 말투에는 프로젝트가 순조롭지 않은 이유가 전부 강유진 탓이라는 듯한 날카로운 책망이 섞여 있었다.
강유진은 차분히 설명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두 차례 진행됐고 기술과 투자 관련 계약도 이미 체결된 상태예요. 투자 비율도 이전에 합의된 사항이고요. 갑자기 변동이 생기면 카이로스 측에서 당연히 불만이...”
하재호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절차가 다 끝나기 전까진 뭐든 바뀔 수 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백미러를 통해 강유진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랑 몇 년을 같이 일하고도 아직 이런 이치도 몰라?”
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그럼, 왜 비율을 줄인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번에는 노윤서가 대신 답했다.
“제 경험상 카이로스 드론은 아직 상업화가 충분하지 않아요. 시장 전망이 프로젝트 서류에 기재된 기대치를 달성하기 어렵고요. 그래서 비율을 줄이는 게 맞다고 판단했어요.”
“카이로스는 오래된 브랜드로 기술력과 사후 서비스가 탄탄해요. 애당초 프라임이 투자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요.”
노윤서는 그녀의 말을 단호히 반박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려면 감정이 아니라 이익부터 챙겨야죠.”
노윤서는 살짝 미소 지으며 하재호를 향해 말했다.
“재호야, 역시 제대로 못 가르쳤네.”
하재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투자에 관한 일보다는 비서 일이 더 맞아.”
노윤서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투자에 관한 일을 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할 뿐만 아니라 안목도 있어야 해. 강 비서님은 학사 출신이라 그런지 프로젝트를 맡기에는 확실히 좀 부족해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