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서태우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방 안은 내내 떠들썩했고 사람들의 웃음과 장난은 끊이지 않았다.
강유진은 하재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속을 심하게 뒤틀리게 하는 통증만이 몰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 가슴을 옥죄는 아픔에 비하면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10월 10일. 그날은 강유진이 술에 중독되고 아이를 잃었던 날이었다.
홀로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시간 하재호는 첫사랑과의 재회를 즐기고 있었다.
“강 비서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가요?”
지나가던 종업원이 바닥에 웅크린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강유진을 보고 놀라 물었다.
강유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발,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구급차 안에서 식은땀이 온몸을 뒤덮을 즈음 하재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예전 같았더라면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강유진은 그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하재호조차도.
강유진은 병원에 닷새 동안 입원했다. 진단명은 심각한 위염.
지난번 술로 인한 중독과 유산 이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닷새 동안 하재호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유진은 하재호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었다.
월요일, 강유진이 다시 회사로 복귀하자 비서 주채은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언니, 들었어요? 우리 프라임에 낙하산 하나 내려왔대요. 그것도 여자래요!”
“낙하산?”
강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재호는 인사에 있어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이었다.
강유진 역시 프라임에 들어올 때 맨 밑바닥 인턴으로 시작했으니 이 회사에 ‘낙하산’ 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채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가 하 대표님 친필 서명된 임명장까지 봤다니까요. 투자3부 이사로 온다더라고요.”
강유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자리는 원래 하재호가 그녀에게 약속했던 자리였다.
수년간 회사를 위해 희생하며 일해온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진작 승진해 독립 프로젝트를 맡아도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하재호는 강유진만큼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며 합당한 비서를 찾지 못해 그녀가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투자3부 이사직은 강유진을 위해 비워두겠다며 프라임이 상장하면 직접 임명해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
강유진은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이름이 뭐래?”
“음... 노 씨였는데 윤 뭐였던 것 같아요. 잘 못 봤어요.”
그 이름에 강유진의 손끝이 떨리며 쥐고 있던 컵이 미끄러졌다. 뜨거운 물이 바닥에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언니! 손 안 데었어요?”
“괜찮아.”
물은 뜨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불에 덴 듯했다.
“노윤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이 공기를 가르자 주채은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 사람 이름 노윤서라고. 곧 투자3부 이사로 올 여자.”
“맞아요! 언니, 아는 사람이에요?”
“몰라.”
강유진은 물컵을 주워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노윤서의 입사 소식은 삽시간에 사내에 퍼졌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강유진에게 사실을 확인하려 들었다.
참고 또 참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자 그녀는 폭발하듯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하 대표님께 여쭤보세요!”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사무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침묵을 깨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호야, 너희 회사 직원들 성격이 좀 거칠어 보인다.”
강유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하재호와 노윤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하재호의 눈길은 차갑도록 무심했다.
그는 곧 시선을 돌리며 사람들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투자3부 이사로 임명받은 노윤서 씨입니다. 앞으로 3부 프로젝트는 전부 노 이사가 맡을 겁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환영 인사를 건넸다.
성격이 쾌활한 노윤서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작은 선물까지 준비해 왔고 하재호는 그것을 직접 들어주고 있었다.
강유진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까지 자신은 하재호 곁에서 모든 것을 짊어졌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첫사랑 앞에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결국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렇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노윤서는 강유진에게도 선물을 내밀었다. 귀여운 카피바라 모양의 손목 보호대였다.
“어머, 똑같은 걸 쓰시네요?”
그녀는 강유진의 책상 위에 놓인 보호대를 보고 놀란 듯 말하더니 곧 하재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재호야, 너랑 취향이 비슷한가 봐.”
이윽고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강유진을 향해 말했다.
“이 선물들 전부 재호랑 같이 고른 건데 똑같은 걸 쓰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괜찮으시면 제가 나중에 다른 걸로 준비해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강유진은 묵묵히 선물을 받아들였고 하재호는 곧 그녀에게 지시했다.
“강 비서, 노 이사를 회사 구석구석 안내해 드려.”
강유진은 거절할 수 없었다. 프라임 비서실의 철칙 중 하나는 대표의 지시가 최우선이라는 것이었다.
노윤서는 누구에게나 다정했고 성격도 원만해 보였다.
완벽에 가까운 얼굴은 온화한 성격과 어울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필시, 수년간 하재호가 마음에 품었던 사람답게 평범할 리 없었다.
회사를 둘러본 뒤, 노윤서는 자신의 사무실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그곳은 불과 보름 전 강유진이 직접 감독하며 완성한 공간이었다.
가구 하나, 장식 하나까지 모두 그녀의 취향으로 채운 곳. 언젠가 자신이 앉게 될 자리라 믿으며 누구보다 기대했던 공간이었다.
마치 하재호와의 결혼을 꿈꾸었던 것처럼.
그러나 지금 사랑도, 일도, 그 무엇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정말 마음에 드네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아요. 게다가 재호랑도 가깝고.”
노윤서는 들뜬 얼굴로 말한 뒤 기쁨을 전하고자 하재호에게 달려갔다.
사무실 한가운데 홀로 서 있던 강유진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성껏 꾸며 놓은 공간을 바라보자 가슴은 무언가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매주 열리는 정오 회의는 프라임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였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도 지각할 수 없었고 강유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단 한 사람, 노윤서만 제외하고.
신입으로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은 그녀는 하재호가 직접 정한 규칙을 당당히 어겼다.
강유진은 당연히 하재호가 불쾌해할 것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지적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마디 비난도, 언급도 없이 담담히 강유진에게 자료를 나눠주라고 지시했다.
그 순간, 강유진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인턴 시절 독감으로 열이 펄펄 끓던 날 강유진은 주간 회의에 지각했고 하재호는 전 직원 앞에서 가차 없이 그녀를 꾸짖었다.
그때도 사실 강유진은 아픈 몸을 이끌고 하재호를 챙기다가 병에 걸린 것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울며 호소했을 때 하재호는 회사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니 규칙은 규칙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때 그녀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며 단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일 뿐 자신을 특별히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오늘 눈앞의 현실은 그 믿음을 무너뜨렸다.
그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럴 만한 상대가 자신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