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쳇, 세상에 그런 판타지가 어디 있겠어. 나도 그런 재벌가 사모님 한번 만나보고 싶다. 재혼이든 뭐든 상관없어. 요즘 반반하게 생긴 우리 또래 애들은 눈에 불 켜고 스폰서 찾느라 전쟁이잖아...”
손태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또다시 양지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유 누나도 혹시... 부자인가?’
사실 양지유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민 회장이 그녀 언니라는 것 외에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민 회장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날 결혼식에서 누군가가 민 회장님을 부르며 굽신거리던 상황을 떠올렸다.
‘말투며 분위기며... 민 회장은 확실히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지. 재력가인 건 틀림없어 보였는데... 지유 누나까지 그런지는 잘 모르겠네.’
“하아...”
윤재형은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으며 잔을 들어 손태하와 가볍게 부딪쳤다.
“요즘은 돈 많은 연상녀랑 결혼하는 게 인생 한 방이야. 다들 꿈은 꾸는데 현실에서 당첨은 안 되는 로또 같은 거지.”
...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나란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간단히 씻고 정리한 뒤 근처에서 아침을 대충 때우고는 함께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입사 첫날이라 계약서 작성부터 사무실 자리 정리, 컴퓨터 세팅까지, 자잘하고 귀찮은 일들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오전이 다 가고서야 간신히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막 자리에 앉아 물 한 모금 넘긴 참이었는데 부서 실장이 손태하에게 다가왔다.
“손태하 씨, 5층 디자인팀에 한 번 가봐요. 컴퓨터가 아예 안 켜진다네요. 방금 그쪽 실장님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강소연 실장이요.”
“네, 실장님. 바로 다녀올게요.”
IT 부서 실장 민지호는 올해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성격도 유해서 부서 사람들은 그냥 ‘실장님’이라고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손태하 역시 자연스레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건 작업지시서니까 일 끝나면 확인 사인 하나만 받아오면 돼요.”
“알겠습니다, 실장님.”
손태하는 업무 지시서를 받아 들고 슬쩍 내용을 훑었다. 별다른 기술적 설명 없이 간단한 기록용 문서였다.
‘첫날부터 바로 실전이네. 이것도 일종의 테스트겠지.’
곧장 5층 디자인팀으로 올라갔다.
‘와... 여긴 분위기부터 다르네.’
복도를 지나며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은 패션 브랜드 회사 디자인팀이라 그런지 왔다 갔다 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스타일 좋은 젊은 여성들이었다.
‘의류 회사답네... 여자 직원들이 많은 것도 납득이 간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던 그는 이내 실장실 표지판을 발견했다.
전화를 걸어온 당사자가 강소연 실장이었으니 이쪽이 맞겠지 싶었다.
손을 뻗어 문을 열려는 찰나 안쪽에서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 회장님, 어제 드린 승인서 아직 결재 안 하신 거예요? 지금 일정이 굉장히 타이트해서요... 좀 서둘러주시면 안 될까요?”
“...”
“네, 회장님. 아, 알겠습니다만 빨리 결재가 안 나면 저희 업무 전체가 지연됩니다. 부탁드릴게요. 진짜 급한 건이라서요.”
손태하는 실장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안에서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조용히 기다렸다가 통화가 끝난 듯한 타이밍에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눈앞에는 세련된 외모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단정한 정장 차림에 분위기까지 강단 있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강소연 실장님. IT 부서에서 나왔습니다. 컴퓨터가 안 켜진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이쪽으로 와서 보셔도 돼요. 혹시 신입이에요?”
강소연은 손태하를 한번 훑어보더니 눈빛이 반짝였다.
IT 부서에 새로 들어온 직원치고는 꽤 인상적인 외모였다. 다만 복장이 조금 투박한 게 아쉬웠다.
“오늘 첫 출근입니다. 손태하라고 합니다.”
“그래요? 나이는 어떻게 돼요?”
“스물둘입니다. 올해 막 졸업했습니다.”
“정말 젊네... 자, 손태하 씨, 카톡 하나만 추가해 줘요. 앞으로 우리 부서 컴퓨터가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실장님.”
손태하는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내 그녀와 카톡 친구 주고받았다.
이후 강소연은 그를 데리고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 직원의 자리로 안내하고 떠났다.
손태하는 컴퓨터를 살펴본 뒤, 금방 원인을 찾았다.
살짝 빠져있던 모니터 선을 다시 꽂자 화면이 정상적으로 켜졌다.
그는 해당 직원에게 간단히 설명한 뒤, 확인 사인을 받고 업무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
“야, 태하야. 벌써 끝낸 거야?”
“모니터 선이 빠져있었더라. 별일 아니었어.”
“야, 근데 너도 느꼈지? 우리 회사에 예쁜 여자 진짜 많지 않냐?”
“하하...”
손태하는 괜히 피식 웃었다.
“아까 디자인팀 쪽 다녀왔는데, 진짜 장난 아니더라. 실장님도 미모가 장난 아니던데?”
“진짜? 와... 나 그런 누나 같은 스타일 진짜 좋아한단 말이야.”
“됐거든. 그렇게 예쁜 누나는 이미 결혼했겠지, 너 같은 애한테 차려질 리가 없잖아. 게다가... 넌 민지영도 있잖아.”
“하아...”
“몇억을 준비하라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친구야, 나를 어디 갖다 팔아도 그 돈 마련하지 못할걸?”
윤재형은 웃음 섞인 말투로 받아쳤지만 분위기는 다소 씁쓸했다.
“아 맞다, 나 아까 담배 피러 나갔다가 들은 건데...”
“뭔데?”
손태하는 컴퓨터를 켜고 개발툴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틈날 때마다 공부라도 해두자는 생각이었다.
“우리 그룹 대표님 있잖아. 지금 병원에 계신대. 상태가 많이 안 좋더라고. 두세 달째 아예 얼굴을 안 비췄대.”
“헐, 진짜야?”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괜히 불안한 기분이 밀려왔다.
“진짜야. 아까 담배 피우던 형들 말 들어보니까 다 오래 다닌 사람들이더라고. 그냥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았어.”
“회사가 괜찮긴 할까... 우리 막 들어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누가 알겠냐. 근데 분위기 보면 다들 좀 불안해하긴 하더라.”
“후...”
손태하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괜히 입맛이 썼다.
‘이제 막 들어왔는데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이야. 진짜 운도 더럽게 없다.’
“야, 뭐 어때. 안 되면 딴 데 가면 되지. 회사야 어디든 있잖아.”
윤재형은 털털하게 말하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렇긴 하지...”
손태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결국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
시간이 조금씩 흘러, 어느새 점심 시단이 가까워졌다.
“가자, 구내식당 가서 밥 먹자.”
윤재형이 웃으며 손태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룹 본사 건물 2층에는 사내 식당이 있었고 가격도 꽤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손태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재형아, 난 점심시간 틈나면 병원 좀 다녀오려고. 식당은 혼자 가. 난 가는 길에 만두라도 하나 사 먹으면 되니까.”
‘괜히 식당에 가면 웨이팅도 오래 걸릴 테고...’
손태하는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무엇보다 오늘 점심에 양지유를 보기로 약속했기에, 그는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알겠어.”
두 사람은 그렇게 짧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