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보호자분, 환자분과는 어떤 관계... 시죠?”
당직 의사는 모니터 데이터를 들여다보다가 놀란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직 손태하가 양지유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눈치였다.
“어, 그게...”
“환자는 제 아내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손태하 씨 되시겠네요?”
“네, 맞아요...”
손태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슬슬 병원 전체에 자기 이름이 퍼진 모양이었다.
‘양지유 환자의 남편, 손태하’라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번지다 보니 이쯤 되면 병원 직원들 중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지도 몰랐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앞으로도 시간 되실 때마다 자주 와서 환자분이랑 이야기 나눠주세요. 환자분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요?”
“물론이죠. 보세요, 심전도만 봐도 아까보다 훨씬 뚜렷하게 반응이 오고 있어요.”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아들뻘인 젊은 남편을 구해온 게 효과가 있긴 하네?”
“...”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속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손태하는 멍하니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양지유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그냥 툭툭 던진 말들이 효과가 있긴 있는 건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냥 계속 얘기해 보자. 사람 하나 살리는 건 절에 불상 일곱 개 세우는 것보다 낫다잖아. 하물며 지금 살려야 할 사람은 내 아내니까. 게다가... 지유 씨가 정말로 석 달만 더 버텨준다면 4억도 받을 수 있는 거고. 그 4억은 내가 평생 볼 수 없을 큰돈이지. 그러니까... 그냥 이것저것 계속 얘기해주는 거야. 나쁠 건 없잖아.’
의사와 간호사가 나간 뒤 손태하는 다시 의자를 병상 가까이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열두 시 반을 넘겼다.
손태하의 입에서 ‘여보’라는 말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여보’, 말끝마다도 ‘여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이 오래된 부부라고 착각할지도 몰랐다.
“여보, 아픈 건 잘 낫고 있는 거지? 나 학교에 좀 다녀와야 해서... 오후에 다시 올게. 괜찮지?”
“대답 없으면 오케이 한 거로 안다?”
“여보, 그럼 나 학교 좀 다녀올게. 이따가 보자.”
손태하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양지유의 손을 살짝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뭐야?”
손태하는 양지유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여보...”
“혹시... 내가 계속 손잡고 있었으면 좋겠어?”
놀란 손태하는 황급히 다시 자리에 앉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배 안 고파? 나는 좀 배가 고프네. 깨어나면 뭐 먹고 싶은지 꼭 말해줘. 내가 사다 줄게, 알았지? 아니면 내가 직접 해줄 수도 있어. 난 요리도 꽤 잘하거든. 하루 세 끼 다 해줄 수 있다니까.”
그는 양지유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어느새 말투도 더 살가워졌다.
“여보, 이제 밥 좀 먹고 올게. 최대한 빨리 다시 올게.”
그는 병실에 잠시 더 머물다가 그녀의 손을 조심히 내려놓고 병실을 나섰다.
...
병원을 나온 손태하는 근처 길가에 있는 허름한 분식집에 들어가 대충 끼니를 때웠다.
그러고는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양지유와 너무 많은 얘기를 해서였을까. 손태하의 머릿속이 온통 그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특히나 그녀가 의식을 되찾지 못했기에 오히려 마음 편히 떠들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저 혼잣말하듯 툭툭 던진 말들과 ‘여보’라는 호칭까지도 이젠 입에 착 붙어버렸다.
만약 그녀가 정말 깨어 있었다면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중간중간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그 수위 높은 멘트들은 더더욱...’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 손태하는 학교 기숙사에 도착했다.
“야, 손태하! 어떻게 됐냐? 일은 잘 끝났어?”
방으로 들어서자 윤재형이 먼저 다가왔다.
“킁킁... 뭐야, 병원 냄새 나는데?”
“응, 잘 마무리했어. 진짜 네 덕분이다. 고마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
손태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재형의 어깨를 툭 쳤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서 병원 냄새 나? 병문안 좀 다녀왔어. 지인 한 분이 갑자기 입원하셔서.”
“아, 그래?”
하지만 그 ‘지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정인지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결혼한 사실도 마찬가지로 철저히 숨겼다.
“참, 오늘 입고 나갔던 그 정장 멋지더라? 핏도 장난 아니고 뭔가 있어 보이더라.”
“그래? 취업 준비한다고 일부러 돈 좀 썼어.”
“뭐라고? 그거 최소 200만 원은 하겠던데?”
“응? 200만 원?”
손태하는 그 정장이 그렇게 비쌀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그럴싸한 옷 한 벌 없이 살아온 터라 민 회장이 건넨 옷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입었을 뿐이었다.
핏이 좋고 원단이 부드러워서 ‘비싼가 보다’ 싶긴 했지만, 가격까지는 생각 못 했던 것이었다.
“설마, 내가 그런 옷 입고 다닐 사람처럼 보여? 짝퉁이야, 짝퉁.”
“아... 그렇지? 놀랐잖아. 혹시 스폰서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하하하...”
윤재형이 슬쩍 속아 넘어가는 걸 보고 손태하는 멋쩍게 웃으며 슬쩍 넘겼다.
...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손태하는 잠깐 눈을 붙이려 침대에 누웠다.
이미 양지유에게 오후에 다시 들르겠다고 말한 이상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띠리리링...”
막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잠시 망설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민 회장이었다.
룸메이트가 들을까 싶어 손태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끌다시피 신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여보세요? 누님, 무슨 일이세요?”
“자네 오늘 낮에 지유 병문안 다녀왔다며?”
“네, 잠깐 다녀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환자랑 자주 얘기해주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요.”
“그래그래... 정말 고마워. 태하 씨, 혹시 시간 괜찮으면 앞으로도 자주 들러줘. 원하면 사례금도 따로 챙겨줄 수 있으니까...”
“아, 그건... 괜찮습니다. 돈은 정말 괜찮습니다. 요즘은 학교생활도 거의 끝나가는 참이라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가능하면 계속 들러볼게요.”
솔직히 말하면 돈은 손태하에게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욕심부터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서로의 입장은 명확했고 그 ‘계약 조건’ 에는 양지유가 석 달을 버텨내면 민 회장에게서 4억 원을 더 받는다는 약속도 포함돼 있었다.
손태하가 병원에 들르는 데에는 분명 그 약속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래도 참 고맙네. 자네만 헛수고하고 끝날 일은 없을 걸세. 내가 어떻게든 보상은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내 동생은 평생 결혼 한 번 못 해봤어. 그러니 이 마지막 시간만큼은 곁에 누군가 있어 줬으면 하네.”
“누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그렇게 할게요.”
계약으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양지유는 이제 손태하의 아내가 되었다.
어떤 이유로 맺어진 관계든, 이미 아내가 된 이상 그녀 곁을 지키는 일은 결국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