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다음 날 아침 일찍 임윤슬은 아침을 차렸다.
공지한이 숙취로 힘들까 봐 속을 달래줄 죽도 끓였다.
하얀 운동복을 입은 공지한은 마치 대학생처럼 젊어 보였고 미간을 구긴 채 계단을 내려와 주방으로 들어섰다.
“일어났어요? 아침 먹어요.”
공지한이 자리에 앉았다.
임윤슬은 그가 아침마다 늘 그렇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그가 앉자 괜히 말을 걸지 않고 그가 죽을 먹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맞은 편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가 끓인 죽은 부드럽고 걸쭉했다. 한 그릇을 다 먹으니 쓰렸던 속도 한결 나아졌다. 전날 과음해서 속이 쓰렸는데 이제야 조금 진정된 듯했다.
띵.
이때 문자가 도착했다.
[지한아, 네가 결혼했다는 거 난 안 믿어.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고 거짓말한 거잖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공지한은 내용을 한번 확인하더니 핸드폰을 옆으로 밀어두고 무시했다. 아침에 카톡에도 문자가 온 걸 보았는데 그는 그때도 무시했던지라 결국 윤하영이 메시지까지 보낸 것이다.
3년 전 윤하영이 떠났을 때 공지한은 윤하영의 연락처를 모조리 지워버렸다. 얼른 그녀를 잊고 정신 차리려 했던 것이다.
띵.
또 다른 문자가 왔다.
[지한아, 그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나 그동안 널 잊은 적 한 번도 없어.]
[난 공항에서 기다릴 거야. 네가 오지 않으면 나도 공항에서 나가지 않아.]
핸드폰을 든 공지한의 마음은 점점 더 뒤숭숭해졌다.
“오늘 할아버지한테는 못 가겠어. 다음에 가자. 할아버지껜 내가 직접 전화할게. 일이 있어서 좀 나가봐야 할 것 같아.”
공지한은 임윤슬에게 말했다.
“네. 다녀와요.”
임윤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지한은 고개를 들어 결혼 3년 차에 접어든 자신의 아내를 보았다. 이제는 시골에서 막 올라온, 영양실조인 것처럼 깡마른 소녀가 아니었다. 세월 속에서 한층 더 성숙해져 건강히 자라난 아름다운 여자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임윤슬은 아주 좋은 아내였고 그의 식생활도 세심하게 챙겼으며 불필요한 간섭은 하지 않았다.
늘 조용하고 화도 낼 줄 모르는 듯했고 집안 식구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그의 친구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성격도 시원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와 한 침대를 쓸 때면 중독된 것처럼 빠져들게 되었고 그는 제어할 수 없는 풋내기 소년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는 자신이 임윤슬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습관처럼 언제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윤하영은 그의 첫사랑이었다. 대학 시절 무용학과의 꽃이었던 그녀와 경영학과의 엘리트였던 그가 사귀게 된 것이다.
공지한은 원래 여자와 거리를 두는 성격이었다. 수많은 고백 편지가 쏟아져도 그는 언제나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던지라 가까이 다가간 여자들은 겁에 질려 울어버릴 정도였다.
그 둘이 연인이 된 것도 윤하영이 집요하게 쫓아다닌 결과였다. 마침내 ‘얼음 같은'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교제 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비록 공지한이 무뚝뚝하고 웃음도 적었지만 윤하영은 언제나 그를 끌고 다니며 춤을 추었고 재잘대며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공지한은 늘 묵묵히 들으며 윤하영의 곁을 지켰다.
졸업 후 공지한은 결혼을 계획했다. 졸업 직전 친구들과 함께 성대한 이벤트를 준비하며 윤하영에게 프러포즈할 마음이었지만 정작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문자를 한 통 받게 되었다.
[지한아, 미안해. 레랑스 파뤠로 유학 갈 기회를 얻었는데 내일 떠나. 졸업하자마자 결혼이라는 족쇄에 묶이고 싶지 않아. 난 내 꿈을 이루고 싶어. 3년만 기다려 줄래?]
공지한은 답장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기다렸다. 윤하영을 향한 마음이 포기가 안 됐던 그였으니까.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윤하영은 돌아오지 않았고 무용단에서 주인공이 될 기회가 오자 그녀는 또다시 그를 버리고 꿈을 선택했다.
헤어지자는 말조차 없이 그렇게 두 사람은 영영 연락이 끊겼다.
그날 밤 공지한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낮에 서둘러 외출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던 임윤슬은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생각하며 걱정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공지한의 비서에게 연락했다.
“이 비서님, 혹시 지금 지한 씨랑 함께 계신가요?”
“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저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오늘 야근 일정도 없으신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사모님.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고 나니 임윤슬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얼른 물을 따라 마셨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며 불안 속에서 잠들었고 이른 아침에 깨어나 보니 공지한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임윤슬은 부엌으로 가 아침을 준비했다. 흰죽과 계란 프라이도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티브이를 켜자 화면 속에서는 아나운서의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연예계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나라 유명한 무용가, 윤하영 씨가 오늘 귀국했습니다. 현재 그룹 대표도 같은 공항에서 포착되었는데요. 일각에서는 두 분이 재결합한 것이 아니냐는...”
툭.
임윤슬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저 여자... 지한 씨 첫사랑이네. 어제 본가에 간다는 약속도 취소하고 급하게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저 여자였어. 아마 어젯밤도 둘이 함께 있었겠지...'
임윤슬은 더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죽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놓은 뒤 설거지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래도 떠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토록 미련이 남는 건지 알지 못했고 두 손이 무심코 아랫배로 향했다.
“아가야... 우리... 아마도 아빠를 떠나야 할지도 몰라. 엄마는 아빠한테 우리 아가 존재를 말할 수 없어.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우리 아가를 아주 많이, 아빠 몫까지 사랑할 거니까.”
임윤슬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공지한을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그의 귀가를 간절히 바란 건 처음이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꺼내는 말이 이혼일까 봐.
또 한편으로는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고 윤하영과 함께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여하간에 공지한은 윤하영을 데리러 공항까지 갔으니 분명 둘이 함께 있을 것이었다.
공지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이었다. 집 안은 유난히도 조용했고 평소처럼 문 앞에서 반겨주는 임윤슬도 없었으며 식탁에 늘 차려져 있던 저녁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이 낯선 고요가 왠지 낯설었다.
임윤슬이 위층에 있는 줄 알고 올라가려던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형체를 발견했다. 다가가 보니 임윤슬이 그곳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임윤슬은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고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있는 공지한을 보게 되었다. 순간 멍하니 굳어 있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공지한이 언제부터 자신의 앞에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 돌아왔어요?”
임윤슬은 그가 오늘 밤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하간에 이미 뉴스가 다 퍼졌으니까.
“내가 안 돌아오면, 그럼 어디 가야 하는데?!”
공지한은 굳어진 얼굴로 쏘아붙였고 그 말투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그냥 다른 볼일이 있는 줄 알았을 뿐이에요.”
임윤슬은 고개를 떨군 채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하게 첫사랑을 만나러 간 거 알고 있다, 뉴스에도 두 사람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온 거냐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제가 깜빡 잠들어서... 저녁을 못 했네요.”
임윤슬은 그의 위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잊고 만 것이다.
“안 먹었어.”
공지한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곧장 식탁으로 걸어가 앉았다.
임윤슬은 이유도 모른 채 삐진 아이처럼 얼굴을 잔뜩 굳힌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국수라도 끓여줄까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