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임윤슬은 조심스럽게 공지한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기에 공지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자, 다 됐어요. 우리도 내려가서 식사해요. 할아버지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요.”
“응.”
두 사람은 함께 서재에서 나와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식탁에 앉아 있던 공대훈은 둘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임윤슬을 향해 손짓했다.
조금 전 공지한을 호되게 꾸짖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윤슬아, 어서 와서 먹자꾸나. 아줌마더러 국부터 가득 떠주라고 할 테니까 쭉 먹고 건강해져야지.”
“네, 할아버지.”
임윤슬은 얌전히 대답하며 공지한과 나란히 앉았다.
공대훈은 임윤슬을 진심으로 아꼈다. 단순히 옛 전우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손자가 겉보기에는 쌀쌀맞아도 정에 약하고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임윤슬은 그런 자신의 손자와 반대로 겉으로는 여리지만 속에는 강단이 있었고 성품도 착하고 단순해 어떤 힘든 일이든 함께 견딜 수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못된 손자가 하루라도 빨리 임윤슬의 가치를 깨닫고 둘이서 알콩달콩 잘 살며 아이를 낳게 된다면 더는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본가에 들어와서 사는 건 어떻겠니? 윤슬이가 맨날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외롭겠지. 들어와 살면 나도 덤으로 벗이 생기고 심심하지 않겠구나.”
“괜찮은 것 같아요.”
공지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공대훈의 말은 틀린 것도 아니었다. 본가로 들어온다면 적어도 임윤슬이 덜 외로울 것이었다. 그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윤슬을 먼저 배려하고 있었다.
공대훈의 말에 사실 임윤슬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게 두려워 이곳으로 이사 올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 이미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아요. 지한 씨가 늦게 들어올 때도 있는데 그러면 오히려 할아버지께서 쉬시는 데 방해가 될 거예요. 그냥 저희끼리 사는 게 더 편해요.”
공지한은 임윤슬이 공대훈의 제안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여하간에 본가로 들어오면 공대훈이 무조건 그녀의 편을 들어줄 테니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건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거절했으니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공대훈은 행여나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윤하영이 두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고 임윤슬의 성격으로는 분명 당하고만 있을 게 뻔해 본가로 들어오면 그나마 옆에서 지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거절했으니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 그래도 이건 기억해. 지한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네 속을 뒤집어 놓기라도 하면 반드시 이 할애비한테 얘기해. 이 할애비가 대신 혼내줄 테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손자를 흘겨보았다.
공지한은 태연하게 밥만 먹으며 못 들은 척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지한 씨는 절 잘 챙겨줘요.”
공지한은 눈썹을 튕기며 임윤슬을 보았다.
사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여전히 어떤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굳이 자기 편을 들어줄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지금 고자질을 해도 공대훈은 분명 임윤슬의 편만 들어줄 것이었다.
임윤슬은 공지한의 눈길에 당황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었다.
“본가로 안 들어오겠다고 하니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거라. 시간이 너무 늦었다.”
공대훈이 말했다.
임윤슬은 공지한이 반박하지 않는 걸 보고 곧바로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뜻밖에도 공지한은 일하러 가지 않고 거실에서 임윤슬과 공대훈과 함께 티브이를 보았다.
그러나 공대훈은 나이 탓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집사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갔고 커다란 거실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임윤슬은 혼자 생각했다.
‘할아버지도 쉬러 들어가셨으니 지한 씨도 굳이 옆에 있어 줄 필요는 없지.'
“당신도 일 보러 가요. 난 좀 더 보다가 방에 들어갈게요.”
“오늘은 안 바빠.”
임윤슬은 그가 보기 드물게 쉬려는 건가 싶었다.
사실 공지한은 티브이를 보는 게 아니라 내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고 공대훈이 쉬러 간 뒤라 임윤슬은 곧바로 소파의 쿠션을 앉고 뒤로 기대며 드라마에 몰입했다.
요즘 즐겨 보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막 업데이트되었으니 오늘은 끝까지 보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녀가 보는 건 사극 드라마였는데 주인공들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결말도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남녀 주인공이 결국 이별을 맞자 몰입했던 임윤슬은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공지한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 뉴스를 훑고 있었다. 사실 처리할 일은 산더미인데 왜인지 여전히 이 자리에 있고 싶었다.
예전의 그는 이런 하찮은 드라마에 시간은 낭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임윤슬이 얌전히 소파에 앉아 드라마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함께 드라마를 보는 지금 이 순간이 사람 사는 집 같았고 가정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공지한은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임윤슬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실 끊어진 진주처럼 멈추지 않았고 눈가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인지 몰라 놀란 공지한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그냥 드라마가... 너무 슬퍼서요. 여주인공이 죽었거든요.”
임윤슬은 힘겹게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사실 공지한에게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어 너무 민망하였지만 가슴이 너무 저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임신한 뒤로 감정 기복이 심해져 자꾸만 사소한 일에도 쉽게 눈물이 났다.
공지한은 드라마 때문에 운다는 그녀의 말에 괜스레 안도했다.
“됐어, 울지 마. 이따가 할아버지가 들으면 내가 당신을 괴롭힌 줄 알겠네.”
공지한은 나직한 목소리로 임윤슬을 달랬고 그 목소리엔 저도 모르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임윤슬은 쉽게 멈추지 못하고 계속 훌쩍였다.
그는 임윤슬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부드럽게 달랬다.
임윤슬은 점차 진정하고 있었지만 둘이 이렇게 나란히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쑥스러웠다.
“자, 이제 그만 울어. 드라마도 끝났으니까 그만 보고 방에 가서 쉬자.”
“네.”
임윤슬은 지금 이 순간 그가 주는 온기가 오히려 자신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달래듯 다정했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엔 윤하영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는 것도 공대훈에게 혼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녀는 멍한 상태로 그의 손에 이끌려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공지한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그의 핸드폰 화면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뜨는 걸 보았다.
“먼저 씻고 있어. 난 전화 좀 받을게.”
“네.”
임윤슬은 몸을 돌려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난 후 문에 등을 기대어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 거실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다정함으로 헛된 착각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임신 사실을 전하면 공지한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틀림없이 좋은 아빠가 될 테니까. 공대훈도 늘 그녀에게 말했었다.
“윤슬아, 지한이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힘든 시절을 보냈단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버텼지. 그래서 정에 약하고 상처도 쉽게 받는 거야. 윤하영 그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아. 지한이는 늘 가정의 온기를 원했으니까. 너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생기면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다.”
이건 공대훈이 그녀에게 해준 조언이었다. 얼른 그녀가 임신해서 공지한을 붙잡기를 바랐지만 몸은 붙잡을 수 있어도 마음마저 붙잡을 수는 없었다. 임윤슬이 바라는 건 공지한의 행복이었고 그 행복을 위해 물러설 수도 있었다.
여자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방금 그 전화가 윤하영에게서 온 것임을.
다만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고 공지한이 이 밤에 윤하영을 찾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겐 막을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계약 결혼을 한 것이니까. 그리고 곧 계약이 끝나간다. 만약 나타나지 않았다면 공대훈이 결혼을 재촉하는 일도 없었고 공지한도 그토록 사랑하는 윤하영과 지금쯤 다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