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배성빈은 다정한 미소를 띤 채 김은주의 입술을 내려다봤다.
잠시 후, 그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두 사람은 그대로 차 안으로 몸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한가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애썼다. 하지만 눈물은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성빈이는... 이미 은주를 임신시켰구나.’
배성빈은 입으로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만의 추억을 다른 여자에게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가을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목이 찢어지도록 따져 묻고 싶었다.
왜냐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
한가을은 어떻게 그 자리를 떠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목적지도 없이 도로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 배성 그룹 본사가 들어왔다.
건물 외벽의 대형 전광판에서는 2년 전의 영상이 여전히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한국의 모든 여자가 부러워했던, 한때는 전설이라 불리던 결혼식이었다.
로맨틱한 에테르나 궁에서 맹세를 나누던 두 사람, 눈물을 글썽이던 배성빈과 그의 곁에 서 있던 한가을...
그 모든 장면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가을은 영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때 배성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을아, 회사에 갑자기 회의가 생겼어.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내일 다시 얘기하자.]
‘하... 내일?’
한가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과거, 아직 배성빈의 외도를 알지 못했을 때도 그는 종종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회의가 생겼다며 늦거나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 어쩌면 그 모든 ‘회의’는 김은주와 함께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김은주랑 회의해?]
곧바로 ‘입력 중’ 표시가 떴지만 한동안 아무 답도 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메시지가 도착했다.
[괜히 오해하지 마. 못 믿겠으면 홍 비서한테 전화해 봐.]
한가을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번엔 김은주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을 언니, 저희가 지하 주차장에서 한 말... 다 들었죠? 솔직히 말해 줄게요. 언니 자리, 제가 차지하는 건 시간문제예요. 지금 오빠 마음의 절반은 이미 저한테 있어요. 전 언니보다 젊고 언니보다 오빠를 더 잘 만족시켜 줄 수 있거든요. 괜히 재벌가에서 버림받은 여자 되기 싫으면 언니가 먼저 이혼해요.]
뒤이어 찢어진 스타킹과 콘돔 사진 몇 장이 첨부되었다.
그 메시지들을 확인한 한가을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죽어서 돌아온 그녀의 소원이 이혼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노골적인 모욕까지 감내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 천둥이 크게 울리더니 곧장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그녀의 창백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한가을은 마지막으로 배성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배성빈, 우리 이혼하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다.
한가을은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팔다리는 납처럼 무거웠고 가슴이 조여 오는 듯 답답해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본 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죽은 몸임에도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다니...’
잠시 후, 한가을은 몸을 힘겹게 일으켜 의자를 밟고 올라 거실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내려왔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사진을 한 번 쓰다듬은 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가위를 들었다.
쫘아악.
사진은 단숨에 찢겨 나갔다.
이어 그녀는 집 안에 있던 모든 앨범과 액자를 꺼내 배성빈과 함께 찍힌 사진을 단 한 장도 남기지 않은 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다음에는 그가 선물했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값이 나가는 것들은 당근에 헐값으로 올렸고 손수 만들었던 선물들은 전부 부숴버린 후 쓰레기통에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집 안의 전시실에 들어섰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결혼식 날 그녀가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빛을 머금은 채 걸려 있었다.
한가을은 한동안 그 앞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가위를 들어 더는 망설이지 않고 드레스를 모조리 잘라냈다.
이어서 배성빈이 직접 디자인한 커다란 핑크 다이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반지였다.
한가을은 반지를 집어 들어 변기 속으로 떨어뜨렸다. 물이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반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와 배성빈은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이였다.
그래서 한가을은 그 기억들이 더럽혀진 채 남겨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걸 끝내고 나자 그녀는 힘이 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배성빈이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