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정서연은 비몽사몽인 채 눈을 떴다. 잠깐 멍해 있다가 새벽 다섯 시 반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남편과 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할 시간이다.
최재현은 속이 약하고 최예진은 입이 까다롭다. 그래서 아침밥은 매일 그녀 몫이었다. 야간 근무를 서서 아침 여섯 시에야 퇴근하는 날도, 병원에서 조식을 주는데도 그녀는 둘이 제대로 안 먹을까 봐 빈속으로 집으로 달려왔었다.
장장 6년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마음은 변한다는 걸 그녀는 잊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생했다고 안아 주더니, 어느 순간 그게 당연해졌고, 결국에는 거부와 싫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치킨과 햄버거를 좋아하고, 음료수와 군것질을 배우고, 그녀가 만든 집밥에는 시큰둥해졌다.
사실 이 알람은 진작 필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스스로 놓지를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알람을 삭제한 뒤 휴대폰을 꺼 두고 다시 잠들었다.
그 시각, 최예진은 환호하며 아빠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빠, 빨리 가요! 우리 나가서 먹어요! 저 치킨 먹고 싶어요! 이따가 엄마 오면 또 집에서 먹어야 하잖아요!”
6년 동안 정서연이 해 온 수고를 알면서도, 매일 똑같은 식단이 지루했던 최재현은 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근데 오전 7시가 다 됐는데 왜 안 돌아오지? 야근인가?’
그는 별생각 없이 최예진을 태우고 차에 올랐다.
도우미가 뛰어나와 말했다.
“대표님은 속 안 좋으시고 예진이도 몸이 약한데 집에서 드시는 게 나아요. 밖에 음식은 건강에 안 좋아요.”
“아줌마! 엄마처럼 잔소리하다가 미움받고 싶어?”
최예진이 차에 올라타며 혀를 내밀었다.
“아빠한테 해고해 달라고 할 수도 있어!”
‘엄마는 짠돌이라 밖에서 안 사 주는 거지. 내가 어려서 모를 줄 알아? 이모가 다 알려 줬거든! 흥!’
정서연이 해외 연수를 간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다.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 어떤 일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이번은 3년짜리 코스이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3개월짜리 연수도 안 갔던 사람이다.
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그녀의 부모 귀에도 이 얘기가 들어갔다. 믿기 힘들어하던 두 사람은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제가 가기로 정해졌고 출발은 한 달 뒤예요.”
“왜 갑자기?”
“늘 바라던 일 아니었어요?”
고개를 떨군 그녀가 되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부모가 물었다.
“재현이는 동의했니?”
“두 분이 알아서 설득해 줄 거라고 믿어요. 출국 전에 제가 직접 알릴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부모가 관심을 두는 건 정수아와 최재현의 관계뿐이라는 걸 안다. 필요한 답은 줬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는 곧장 회진을 돌았다.
그 시각, 정서연과 전화를 끊은 직후 정수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최재현의 개인비서로 뽑혔다고, 축하할 겸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박경희가 물었다.
“수아야, 요즘 네 언니랑 연락은 했니? 걔...”
“엄마! 저 좋은 소식 얘기하는데 언니 얘기는 좀 그만해요. 주소 보낼 테니까 오늘 꼭 와요. 아, 언니도 불러요.”
결국 그들은 정서연을 부르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니 최재현과 최예진도 와 있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 갈 무렵, 정태석은 정서연의 3년 연수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최 대표, 사실 서연이가...”
그들은 정서연이 정수아와 최재현을 위해 물러나 주길 바랐지만, 정작 최재현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최재현이 정말 정수아와 함께하고 싶었다면, 이혼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반년이 지나도록 최재현은 이혼하겠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재현이 정서연과 이혼할 의사가 없는 걸까? 그렇게 되면 정수아가 최재현과 결혼한다고 해도 행복할 리 없었다.
박경희와 정태석은 이 기회를 빌려 최재현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했다. 그러나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정수아가 툭 끼어들었다.
“또 무슨 얘기 하려고요? 오늘은 기쁜 날이잖아요. 우리 다 같이 재현 오빠한테 건배해요. 이 비서 자리 재현 오빠가 직접 준 거니까!”
정수아는 최재현의 팔을 당겨 꼭 껴안았다. 박경희와 정태석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섭기까지 했다.
그들은 정수아의 의중을 눈치챘다. 정수아와 최재현의 친밀한 태도로 봤을 때, 그녀를 맞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가까이 두지 않을 터였다.
그때 최예진이 정수아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저도 아빠랑 이모랑 영원히 같이 있을 거예요!”
박경희와 정태석은 입술을 꾹 다물고 말을 완전히 삼켰다.
최재현이 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방금 정서연 얘기하시는 거예요?”
박경희와 정태석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다 같이 한잔하자.”
자식 복은 자식이 짓는다는 생각으로, 박경희와 정태석은 더 깊이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정수아는 그날 가족 모임 사진을 찍어 정서연에게 보냈다.
[내가 잃어버린 건 전부 되찾을 거야!]
정서연은 사진을 보자마자 삭제했다. 우스웠다. 예전에 최재현이 그녀를 이용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걸 정수아가 몰랐을 리 없는데, 왜 모든 원망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걸까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오늘 일찍 끝났는데 예진이 데리러 안 가요?”
동료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정닥 요즘 어딘가 변한 것 같아요.”
정서연은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퇴근 후 정서연은 시장에 들러 과일과 채소를 사고, 윤기 좋은 땅콩이 보여서 조금 더 샀다.
집안 사람들은 그녀가 땅콩을 좋아하는 걸 몰랐다. 부모는 정수아가 싫어해서 사 주지 않았고, 남편은 딸의 알레르기 때문에 사 주지 않았다. 그런 음식을 이제야 비로소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땅콩이 한창 삶아질 때, 오랫동안 조용했던 번호가 울렸다. 이번 생에 다시 울릴 줄은 몰랐던 번호였다.
“다음 달 중에 연수 온다며?”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올 거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아니면 나한테 말하기 두려웠던 건가?”
“연수 가서 연락하려고 했어.”
정서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상대가 잠시 침묵하자 정서연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낮고 서늘한 말이 이어졌다.
“우리 내기 기억나지? 정서연, 이번은 네가 진 거야.”
“응, 인정해.”
말이 끝나자 거친 숨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인정? 네가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어? 나랑 어떻게 약속했는데! 너 내가 진짜...”
“나는 포기하면 안 돼? 사랑에서 졌으면 일에서 이기면 되잖아. 이번 신약 연구, 대박 날 수도 있어. 너라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는 단호하게 남자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는 추호의 슬픔도 담기지 않았다.
그 점이 의아했던 남자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정말 다 내려놓은 거야? 후회 안 해?”
“안 해.”
전화를 끊은 정서연은 땅콩을 건져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 접시에 예쁘게 늘어놓았다. 고소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그 향은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나갔던 반년 동안, 처음 그와 마주하던 순간에 났던 냄새와 아주 비슷했다.